[정상규의 히든 히어로] “살아 무엇하랴, 목숨 끊겠노라” 독립군 장군 구해낸 연설

입력 2020-04-25 08:00 수정 2020-04-25 08:00

신홍균(사진)은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의업을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었고 신홍균이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 역시 별로 없다. 그러나, 그의 개명된 이름, 그의 아명은 달랐다. 1911년, 신홍균은 30세의 나이에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압록강을 건넜다. 그가 도착한 곳은 중국 봉천성 장백현 17도구였다. ‘도구’는 우리로 따지면 주소에서 ‘면, 리’ 등에 해당한다. 그가 어떤 이유로 만주로 향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4000평의 토지를 종손에게 전부 위탁하고 홀연히 만주로 떠난 것이 유서에서 발견되었고 한의사였던 신홍균은 그곳에서 생업으로 의술을 펼치며 살아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그러던 1916년 여름, 어느 날. 독립운동가 김중건(원종교·대진단을 만들어 항일무장투쟁을 펼친 독립운동가. 함남 영흥 출신)이 장백현 17도구 왕가동으로 자신의 부하 6~7명을 이끌고 찾아왔다. 1914년 봄에 북간도로 망명한 김중건은 독립군 ‘대진단’을 만들기 전 민족종교 원종교를 만들어 한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의사 신홍균과 독립운동가 김중건의 만남. 이 만남은 신홍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장백현

민족종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김중건의 큰 뜻에 감명받은 신홍균은 남은 삶을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 1920년 5월 김중건이 200여 명의 청년과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했다. 당시는 일제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1920년 10월부터 3~4개월 동안 보복 차원에서 간도지역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는데, 이때 원종교 집무실이 불타고 김중건이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대진단 본부가 와해될 위기에 처했으나 장백현 16도구에 있던 ‘장백현 지단’은 온전하여 당시 흥업단·광복단·태극단 등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신홍균은 일본군을 탈출한 김중건과 함께 1921년 원종 교도들을 이끌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지방 법회를 조직하고 원종 학교를 설립했다. 김중건은 대한국민단 간도 지방 지단장으로 활동했다. 지단장은 군자금 모집 활동을 주로 했는데 이 행적이 드러나 일본군의 급습을 받게된다. 이 사건으로 김중건을 포함 동지 10여 명이 다시 검거되었다. 이들은 위에서 말한 ‘만몽조약’에 따라 3년간 중국재류금지 명령을 받고 고향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이때 김중건의 빈자리를 신홍균이 채웠다. 그는 단장이 사라진 대진단을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계속해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1925년. 3년 만에 국외로 추방되었던 김중건이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후 행한 첫 번째 일은 새로운 원종 조직을 ‘남성 위주에서 여성과 함께’로 재편성하는 일이었다. ‘여성종우회’ 같은 단체를 조직해 ‘새바람’ 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순회강연과 연극 활동을 통해 계몽운동을 하며 다시 원종교와 대진단 세력을 키워나갔다.

1925년 6월, 중국과 일제는 ‘삼시협정’을 체결했다. 중국 지방 당국으로부터 독립운동가를 포함한 조선인 전체가 탄압을 받았고 이로 인해 북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단체들은 존립 그 자체가 위기에 놓였다. 원종교와 대진단은 한인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지역 내 한인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들은 당시 비적들, 토비세력으로부터 지역 마을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시간이 흘러 당시 도움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신홍균과 독립군들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글을 써 기록한 자료도 발견됐다. 당시 사용한 말투, 한자어, 지역 등 여러 가지 조건이 당시 목숨을 빚졌으나 아무것도 갚을 수 있는 게 없는 어느 평범한 마을 사람들의 솔직한 표현들이 담겨 있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1932년 3월 일제에 의해 만주국이 수립되고 만주군까지 편성되자,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민중들과 함께 본격적인 한중연합 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1933년 3월 초, 한국독립군의 지청천으로부터 김중건에게 연합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한국독립군은 비록 제1차 쌍성보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뒀지만, 1932년 11월 제2차 쌍성보 전투에서는 패하여 부대를 정비한 후, 동만주 만·소 국경지대로 이동하여 길림구국군 부대와 다시 연합한 뒤, 1933년 2월 경박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동경성을 점령하고 영안현・이도하자 등지에서 일본군・만주군과 전투를 전개했다. 사실 2차 쌍성보 전투는 패배라고 보기는 조금 어렵다. 다시 발발한 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이 일본군 중대를 전멸시키자 만주에 있던 일본군은 폭격기를 동원한 대규모 병력으로 반격했다. 한중연합군은 치열하게 싸우다 전략적 후퇴를 한 것일 뿐이었다.

김중건은 지청천의 제의를 받아들여 평소 비축했던 물자와 장병 제1진인 부하 50여명을 보냈다. 여기에 한의사 신홍균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신홍균은 결코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김중건과의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란 걸. 가장 신뢰하는 부하들 50여 명이 떠나자 조선공산군 이광(李光) 부대가 군수물자를 빼앗기 위해 김중건 부대를 습격한다. 어복촌 주민들을 모아 놓고 김중건과 간부들은 모두 처형당했고, 김중건이 살해된 후 어복촌은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당시 지청천이 이끌고 있던 한국독립군이 김중건 부대의 소식을 듣고 구출하기 위해 급히 군대를 파견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때 지청천을 도우려고 떠났던 김중건의 정예 부하 50여 명이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 사건은 신홍균의 가슴속에 평생의 한으로 자리 잡게 된다. 자신이 옆에서 지키지 못했다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낀 것이다.

신홍균은 1933년 3월 김중건의 마지막 지시에 따라 부하들을 이끌고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에 합류한다. 이로인해 한국독립군은 그 규모나 군사력이 향상했고 신홍균은 한국독립군의 일원으로 사도하자, 동경성, 대전자령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사도하자, 동경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한국독립군은 중국 연길 왕청현 동북의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라자구(羅子溝)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연길현 방면으로 철수할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군은 1600여명 규모의 ‘간도파견군’으로 지휘관은 이케다 신이치(池田信吉) 대좌였다. 한중연합군은 매복하여 적군을 공격할 수 있는 지점을 선정하여 부대를 배치했는데 대전자령은 일본군이 왕청이라는 지역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점이었다. 정리하면 ‘라자구–대전자령–왕청’으로 이어진다.

실제 이곳에 가보니 기다란 협곡으로 마치 ‘乙’자 모양이 연상되는 굽은 길이었다. 주변에는 가파른 절벽과 나무가 많아 계절을 고려하면 산림지역 특성상 적을 공격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다. 한국독립군은 6월 28~29일경 적의 통과 예상지점인 대전자령의 서쪽 양편 계곡에 매복했다. 한중연합군은 계곡 양편 산기슭에 구축된 참호 속에 매복·대기하여 일본군 습격 준비를 했다. 그런데 출발 예정일인 6월 28일 아침부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출발하기로 예정된, 아니 출발해야만 하는 일본군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꼼짝없이 한중연합군은 폭우와 굶주림을 견뎌내며 매복한 장소에서 계속 기한 없이 기다렸다. 한중연합군이 만든 참호 속에 빗물이 괴어 허리까지 넘쳐흐르고 준비한 식량이 다 떨어져 가는데도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자 한중연합군이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청천과 조경한 등이 한국독립군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참호를 돌며 격려하고 인내심을 북돋워 주었지만, 식량이 떨어진 데다 빗물에 젖은 몸은 추위에 떨어야 했다. 바로 이때였다. 신홍균이 숲속에 자생하는 검은 버섯을 뜯어왔다.

“이것 좀 잡수시오. 가을장마 끝에 숲속에 돋는 검정 버섯인데 중국인들이 요리로 많이 애용하고 요기치풍(療飢治風)도 하지요. 이것 빗물에 씻어서 소금에 범벅했으니 잠시 요기는 되실 겁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백강 조경한과 지청천은 각 부대에 신속히 명령하여 굶주림에 허덕이는 독립군들에게 버섯을 먹였다. 당시 조경한은 이 점이 매우 인상 깊어서 독립운동 회고록 ‘대전자대첩’에서 신홍균의 활동을 글로 자세히 남겼다.

大甸子大捷
韓亡志士競流亡 나라가 망하니 지사들이 앞 다투어 망명했네.
生聚養兵事全忙 이역에서 군량 모아 양병하니
臥薪嘗膽甘如嗜 와신상담하는 맛을 견줄 데 없네.
(중략)
據說汪淸大甸子 왕청현 대전자 깊은 골짜기에
飯塚狼群來徜徉 飯塚(일본군 부대명)의 이리떼(일본군) 지난다기에
酉年六月東京城 계유년(1933년) 6월 동경성에서 정병을 이끌고
預備往攻選銳剛 불원천리 달려갔네
峻嶺險林幾百里 높은 고개, 험한 숲 넘고 헤쳐 수 백리
征人勞苦斷肝腸 단장의 그 고초를 어찌 다 말을 하리요.
(중략)
赤鳥黃兎近三匝 해와 달 뜨고 지기 세 차례이건만
苦待天狼奚到遲 기다리는 이리떼는 아직도 보이지 않네
餱糧罄竭飢侵肚 바닥난 군량은 굶주림을 더하고,
䨟沛連綿冷逼肌 장맛비 차가움 뼈 속에 스며든다.
黑蓸採取和鹽食 검정버섯 따다가 소금 절여 먹어보니
非獨治風且療饑 요기도 되려니와 치풍도 된다누나
可愛奇方何處出 어여쁘다. 이 기방 누구에서 나왔느냐.
姓申名矻是軍醫 그는 바로 군의관 신굴(申矻)이다.
(하략)

배고픔과 추위를 달래며 일본군을 기다린 지 3일 후인 6월 30일 아침 6시경, 일본군이 드디어 자동차와 우마차에 화물을 싣고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하였다. 행렬의 선두는 화물자동차부대, 가운데는 우마차대, 후미에는 자동차 여러 대가 뒤를 따랐다. 당시 간도 파견군은 이케다 대좌가 인솔하는 회령주둔 보병 제75연대 소속의 주력 부대 500여 명, 山砲隊 본부 및 산포 2개 중대, 함흥주둔 보병 제74연대 보병 3개 중대, 기관 총대 1개 중대와 야포 2개 중대, 기병 1개 소대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날 오후 1시경 일본군의 전초부대가 지나간 뒤 화물자동차를 앞세우고 본대가 계곡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후미 부대가 매복한 골짜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면 총공격을 개시하자고 하였는데, 시세영 부대가 성급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한국독립군은 사격과 함께 바위를 굴려 일본군을 살상하고 자동차와 우마차를 파괴하여 적을 완전히 포위·고립시켰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어찌하지 못하고 중무기와 차량 등을 버리고 도주코자 하였으나 거의 궤멸했다.

대전자령 전투는 4~5시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일본군은 130여 명 이상이 살상되었고 많은 병력이 사산·도주하는 치명적 손상을 입고 일부 부대가 빠져나가는 데 그쳤다. 승리한 한중연합군은 각종 무기·탄약·피복·식량 등 엄청난 물량의 군용품을 노획했다. 그날 오후에 또 비가 내리고 날이 저물어 한중연합군은 이튿날인 7월 1일 아침에 전장을 정리했다.

대전자 전투 당시 상황을 게재한 중앙일보 1975년 4월 16일 지면.

한국독립군은 대전자령 전투에서 길림구국군 시세영 부대와 연합, 한중 합작의 형태였지만 크게 활약하였다. 대전자령 전투는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에 버금가는 빛나는 대첩이었다.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과 노획품을 분배한 후 약 40일간 대전자에 주둔하면서 무장을 강화하고 훈련을 시행하는 등 부대를 재편성했다.

한국독립군은 오의성 휘하의 시세영·史忠恒등의 부대, 중국공산당 계통의 훈춘·왕청 유격대 한인부대와 연합하여 1933년 9월 6일 중·소 국경지대의 동녕현성을 공격하였다. 한중연합군은 처음에는 적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여러 부대와 함께 대전자에 주둔하였다. 이때 참모장 주보중은 陳翰章 등 중국공산당원과 함께 길림구국군 부대의 공산화와 통일전선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해 8월 초 길림구국군 사령관 오의성은 한국독립군에 대해 길림구국군에 합류할 것과 무기의 절반 이상을 넘기라는 무리한 요구를 몇 차례나 강요하였다. 그러나 지청천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주보중과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한국독립군 병사들이 1932년 2월 용정에서 조직된 친일반공단체 민생단(民生團)과 내통하고 있다며 음해까지 했다.

왼쪽부터 길림구국군 왕덕림, 오의성, 사충항, 시세영.

이를 빌미로 오의성은 1933년 10월 13일 밤에 산하 부대를 동원하여 지청천 등 330여명의 한국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을 해제하며, 상당수의 장교와 사병들을 무고하게 구금했다. 김중건의 상황과 동일했다. 이때 지청천 역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신홍균은 구금되지 않아 병사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였고 선전대를 거느리고 훈춘 방면으로 계몽강연을 나갔던 조경한이 곧 돌아왔다. 눈 앞에 펼쳐진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경한도 매우 당황했지만, 그는 곧 기지를 발휘해 시세영 등 구국군 간부들을 설득했고 오의성을 찾아갔다. 조경한의 노력으로 한국독립군은 대다수 풀려났으나 지청천은 풀어주지 않았다. 지청천에게 가한 수모를 생각하면 훗날이 두려웠다. 조경한과 다른 장교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때 신홍균이 갑자기 불쑥 나서며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 50이 되도록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처자를 버리고 만주에 와서 돌아다니다가 김소래 선생을 만나 지도를 받았는데, 그분은 불행히 공산도배에게 학살되었고 그분의 평일 유명에 의해 지청청 장군의 휘하에 들어와 장군을 유일한 砥柱로 앙모하고 섬겨 왔는데 또 장군을 잃게 되었으니 내 살아 무엇하랴? 이로써 목숨을 끊겠노라.”

군의관 신홍균은 이때 실제로 자결 시도를 했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목숨을 건 일장연설에 길림구국군은 누가 봐도 불명예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됐고 결국 지청천을 풀어준다. 만약 신홍균이 아니었다면 지청천은 이때 필시 사망했을 것이고, 1940년대 임시정부 계열 인사들과 함께 광복군을 설립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뒤에도 한국독립군의 활동은 여러 고비를 맞이했고 항일투쟁 의지가 남달랐던 일부 인사들은 동북인민혁명군 등에 참가해 계속해서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이때 신홍균은 병사들을 인솔해 밀산 지역으로 이동, 후일을 기약했다. 중국 중경 신문기자 갈적봉이 1934년 5월 작성한 ‘조선혁명기’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동북의 한국독립군은 신흘…. 등이 인솔하여 영안, 목릉, 밀산 등의 산림지대로 이동하여 항일 운동을 계속하였다.’ 최근 일본 방위성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신홍균을 잡으러 온 일본 경찰은 신홍균의 동생 신동균(신동현)을 보복으로 끌고 가 살해해 압록강에 수장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신홍균은 동생의 복수에 나섰다.

‘두지리 일본 헌병 주재소를 습격한 5명의 독립군들. 이튿날 다시 2명을 보충하여 다시 습격을 감행 (일본 방위성 자료)’

이것이 신홍균의 공식적인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의지는 자신의 조카 신현표로 이어지고 지금의 자생한방병원 설립 정신의 근간이 됐다.

정상규 작가는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통해 숨겨진 위인을 발굴해왔다. 현재 ‘국가유공자 지원 시민단체 포윅스’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독립운동 맞습니다’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