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최종보스’ 트럼프 억지에 美보건당국자들 수난

입력 2020-04-24 04:20
로버트 레드필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 국장(오른쪽)이 22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미국 정부의 보건당국자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건 대통령이다. 코로나19 사태를 정치화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보건전문가들의 과학적 분석을 수시로 짓누르며 이들을 자기 말에 따르는 로봇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코로나19 브리핑을 시작하자마자 ‘가짜뉴스’ 논란을 제기했다. 코로나19 겨울철 재확산 가능성을 경고한 로버트 레드필드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장의 인터뷰가 그의 발언을 잘못 인용한 가짜뉴스라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하루 빨리 끝내고 경제활동을 재개하길 원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코로나19 재확산 경고가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한바탕 격앙된 발언을 쏟아낸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레드필드 국장을 브리핑 연단에 불러세워 공개적으로 발언을 정정하라고 요구했다. 불려나온 레드필드 국장은 “독감과 코로나19가 동시에 발병하면 더 힘들어지고 어쩌면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얘기였지, 더 악화될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바로 옆에서 자신을 쏘아보는 트럼프 대통령을 의식한 듯 “더 힘들어질 것이라는 말이 더 불가능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며 “공공보건 인프라를 확충하면 지금처럼 완화정책을 쓰지 않고도 통제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레드필드 국장의 인터뷰를 게재한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해명에 대해 “대통령 옆에서 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론적으로는 자신의 발언이 제대로 인용됐다고 얘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생물의약품첨단연구개발국(BARDA)의 릭 브라이트 국장은 이날 성명을 통해 “21일 BARDA 국장과 보건부 부차관보 직에서 해임돼 국립보건연구원(NIH) 한직으로 좌천됐다”고 밝혔다. 그는 인플루엔자 백신 전문가로 세계보건기구(WHO)의 인정을 받는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브라이트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 사태의 ‘게임 체인저’라며 치료제로 홍보한 말라리아약 ‘하이드록시클로로퀸(클로로퀸)’ 사용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사보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클로로퀸은 뚜렷한 효능 없이 오히려 사망 확률만 높인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그 위상에 금이 간 상태다.

브라이트 국장은 “이번 인사는 코로나19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가치가 없는 약이 아니라 안전하고 검증된 해결책에 의회가 배정한 수십억 달러의 예산을 투자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한 보복 조치”라며 “이 치명적 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서는 정치와 연줄이 아닌 과학이 길을 인도해야 한다고 믿기에 이렇게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WP는 이날 ‘트럼프 치하, 코로나바이러스 과학자들은 선을 넘지 않은 한에서만 얘기할 수 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변덕스럽고 때로는 부정확한 트럼프 대통령의 코로나바이러스 의견에 도전하는 사람은 벌을 받거나 속죄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대통령 자신이 보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행정부에서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낸 캐슬린 시벨리우스도 CNN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코로나19 대응에 대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대통령의 코로나19 일일 브리핑을 보면 감염병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둘러싸고 지나치게 많은 정치적 해석이 나온다”며 “나는 그 점이 매우 두렵다”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