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코타키나발루 사기범, 피해자가 잡고 경찰은 놓치고

입력 2020-04-23 16:24 수정 2020-04-23 18:32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상습적으로 환전·투자 사기를 일삼아온 수배범을 피해자가 직접 잡아 와 경찰에 넘겼지만, 경찰의 안이한 대응으로 피의자가 다시 필리핀으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해외 사기 수배범을 조사하면서 최소한의 출국금지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경찰은 뒤늦게 여권 무효화 조치를 취하고 나섰지만, 수배범의 구체적인 행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인천에서 자영업을 하는 A씨는 2016년 10월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로 떠난 가족여행에서 일명 ‘K’로 불리는 현지 한국인 가이드 고모(47)씨를 처음 만났다. A씨 가족의 여행일정을 알뜰히 살피던 고씨는 여행이 끝난 뒤에도 “한국에는 잘 도착하셨냐. 기회가 되면 또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는 등 A씨를 각별하게 챙겼다. 말레이시아 이민을 생각하던 A씨는 이후 코타키나발루로 여행을 갈 때마다 친절한 모습을 보이던 고씨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고씨는 2018년 말부터 A씨에게 자신의 여행사업에 투자할 것을 권하기 시작했다. 투어에 이용되는 승합차를 구매해 주면 매달 120만~150만원 정도의 수익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나쁘지 않은 권유라 생각했던 A씨는 2019년 1월과 3월, 4월 세 차례에 걸쳐 총 4160만원을 차량 구입비용으로 고씨에게 보냈다.

그러나 차량 출고 시점이라고 했던 그해 9월이 지났지만 고씨는 차량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차량은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는 명확히 답을 하지 않고 말을 돌리기만 했다. 지난 1월 초 A씨는 “아내의 수술 때문에 현금이 필요하니 차를 팔아서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고씨는 이때부터 A씨의 연락을 아예 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기를 직감한 A씨는 알고 지내던 코타키나발루 현지 한국인들을 통해 고씨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이야기가 돌아왔다. 현지에서도 A씨처럼 차량지입사기, 여행사 투자사기, 환전사기 등을 당한 피해자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A씨는 23일 “제가 직접 파악한 현지 한국인 피해자만 5~6명이고, 사기 피해액도 억대”라고 설명했다. 코타키나발루로 여행을 갔다가 고씨를 만난 한국인 중에서도 사기를 당했다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현지 한국인 가이드 고모씨에게 사기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올린 글 스크린 캡처. 피해자 A씨 제공


고씨의 사기행각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A씨는 1월 중순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A씨는 고소인 조사를 받으면서야 고씨가 이 건 외에 다른 사기범죄 2건으로 수배 중인 사기꾼임을 알게 됐다. 해외로 도피한 탓에 고씨 사건은 기소중지된 상태였다. 그러나 처음 사건을 맡았던 인천중부경찰서는 “고씨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조사가 더 진행되기 어렵다”고 했다.

수사당국의 대응에 실망한 A씨는 직접 고씨를 잡기로 했다. 2월 29일 직접 비행기 티켓을 끊고 코타키나발루로 날아갔다. 현지 한국인 사기 피해자들과 힘을 모아 고씨의 은둔지를 확인한 뒤 고씨를 붙잡았다. A씨는 이튿날인 3월 1일 새벽 고씨를 함께 비행기에 태워 인천국제공항까지 끌고 왔다. 고씨의 비행기 티켓까지 A씨가 자비로 샀다. 고씨는 곧장 인천공항경찰대로 인계된 뒤 별도의 다른 사기사건을 수사하던 남양주경찰서로 이송됐다. A씨는 “고씨가 또다시 해외로 나갈 수 있으니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담당 경찰에 신신당부했다.

피해자 A씨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에서 직접 잡아온 사기 수배범 고모씨(가운데)가 지난달 1일 새벽 인천공항 입국 즉시 공항경비대 소속 경찰에 인계되는 모습. 피해자 A씨 제공

그러나 경찰은 지난달 2일 고씨를 남양주에 있는 집으로 귀가 조치했다. 조사날짜만 2주일 뒤인 3월 16일로 잡아둔 채였다. 남양주경찰서 관계자는 “본인이 코뼈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고, 관할 지역 내에 명확한 소재지와 연락처가 있어 구속수사가 필요한 사안으로 판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A씨는 예정된 조사날짜에 경찰에 전화해 조사 진행 상황을 물었다. 하지만 “고씨가 연락을 받지 않고 잠적한 상태”라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달 24일 출입국조회를 해 봤더니 고씨는 이미 열흘 전인 14일 필리핀으로 출국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 사기 수배범을 조사하면서 최소한의 출국금지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셈이다. 고씨는 필리핀에서 담당 경찰에게 “필리핀 팔라완에 있으니 4~5월 중으로는 돌아가 조사를 받겠다”며 문자를 보내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경찰은 인터폴에 고씨의 여권 무효화를 신청하는 등 대응에 나섰지만, 아직 고씨의 정확한 소재는 파악조차 못하는 상황이다.

A씨는 “피해자가 직접 사비 들여 해외까지 가서 수배범을 잡아 왔는데, 경찰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놓쳐버리니 허탈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