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의 전설’ 박수근과 장욱진, 큰딸들이 추억하는 이들의 삶

입력 2020-04-23 15:20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박수근(1914~1965)과 장욱진(1917~1990). 두 거장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이색적인 신간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제목은 ‘내 아버지 박수근’과 ‘내 아버지 장욱진’(이상 삼인). 각각 두 화가의 장녀들이 발표한 책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린 딸들이 뒤늦게 아버지의 삶을 돌아본 회고록이다.

‘내 아버지 박수근’은 박인숙(76)씨가 썼다. 알려졌다시피 박수근은 살아생전에 지금 같은 명성을 누린 작가가 아니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박수근은 숨을 거두기 전까지 “고독과 가난과 병고에” 시달린 불운의 작가였다.

화가 박수근이 서울 전농동 자택에서 찍은 사진. 삼인 제공

그렇다면 ‘자연인 박수근’의 삶은 어땠을까. ‘내 아버지 박수근’에는 인터넷 검색이나 여타 책들에서는 접할 수 없던 정보가 한가득 담겨 있다. 예컨대 박씨는 아버지의 작업실 풍경을 묘사하면서 “화가의 화실치고 그렇게 깔끔한 공간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수근은 항상 붓 연필 물감 등을 정해진 자리에 놓아두었다. 딸에게 “인숙아, 이리 들어와 봐라”고 한 뒤 짓궂은 부탁을 할 때도 있었다. 방에 들어가면 박수근은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는 딸에게 “어금니에 뭐가 낀 것 같으니 잘 파보라”면서 이를 쑤셔달라고 부탁했다.

박씨는 “아버지는 내게 대자연이었다”며 “(아버지는) 내게 삶과 인간을 가르쳐주신 분,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인간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몸소 일러주신 분이었다”고 말한다. 아버지 작품의 색감을 ‘갯벌색’으로 규정하면서 “(아버지의 선과 색을 보면) 서해의 고요한 갯벌을 보고 선 듯 어느새 지나온 시절을 돌아보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박수근은 생의 마지막 순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내 아버지 장욱진’에서도 대가의 평범했던 삶과 비범했던 예술 세계를 두루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장욱진미술관 명예관장인 장경수(75)씨. 책에는 딸에게 한없이 살뜰했던 장욱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장욱진은 딸의 연필을 깎아 필통에 넣어주곤 했다. 딸의 머리를 잘라주거나, 딸한테 술 먹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술병을 거꾸로 그린 그림을 그린 적도 있었다.

화가 장욱진이 서울 명륜동에 살던 1977년 사진. 삼인 제공

딸에겐 따뜻했지만 화가로서 장욱진은 철저하게 그림에만 몰두한,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예술가였다. 과거 한 일간지는 장욱진을 ‘최고가(最高價) 화가’로 꼽았는데, 이 내용을 전해 들은 뒤 장욱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림에 가격을 매기다니 난 슬퍼.”

남들은 모두 받기를 원하는 유명한 상들에 대해서 “재수 없다”고 쏘아붙이곤 했던 게 장욱진이었다. ‘내 아버지 장욱진’에는 이런 글도 적혀 있다. “누군가 당신 그림을 좋아하거나 아버지가 마음에 들면 나눠주기는 해도 그림이 돈으로 환산되는 무엇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은 잘 팔리는 화가가 아니라 당신이 그릴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으며 당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