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버린 엄마 용서, 비현실적이라는 말 더 슬퍼”

입력 2020-04-22 17:24 수정 2020-04-22 17:48
영화사 삼순 제공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호평받은 영화 ‘바람의 언덕’은 제목처럼 고요하면서도, 때로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을 닮았다. 신산한 두 여인의 삶을 담담히 따라가면 어느새 마음이 거세게 일렁여서다. 그들의 삶을 체험한 듯도 싶다.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둔 2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박석영(47·사진) 감독은 “앞서 지역 상영관에서 영화를 본 많은 관객이 ‘나도 엄마로 사는 게 무서웠다’ ‘나는 날 버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같은 이야기들을 건넸다”며 “영화적 평가보단 감상이 많았다. 관객이 이 영화에서 우리 인생사의 내밀한 어떤 부분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데뷔작 ‘들꽃’(2014)부터 ‘스틸 플라워’(2015) ‘재꽃’(2016)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꽃 3부작’으로 단숨에 주목받는 독립영화 감독 반열에 올랐다. ‘바람의 언덕’은 청춘의 아픔과 성장을 그렸던 전작과 달리 한 모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태백을 배경으로 엄마가 되기 두려워 새 삶을 찾아 나섰던 여자 영분(정은경)과 엄마가 지어준 이름처럼 환하게 살려고 노력해온 딸 한희(장선)이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영화는 5년 동안 함께한 윤식이 병으로 죽고 혼자가 된 영분이 고향 태백으로 돌아가며 시작된다. 고향 햇빛 모텔에서 청소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영분은 그리움에 필라테스 강사로 일하는 한희를 찾아간다. 영분은 한희가 딸인 줄 알지만, 한희는 모른다. 얼떨결에 수업까지 등록한 영분은 한희 몰래 늦은 밤 필라테스 학원 홍보 전단을 붙이고 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수업이 진행될수록 둘의 관계는 끈끈해져 간다.


영화사 삼순 제공


이야기는 ‘바람의 언덕’ 제작사 영화사 삼순 대표인 어머니 제안에서 시작됐다.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찍어달라”는 어머니의 제안에 박 감독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심리적으로 가장 먼 곳”인 태백에 작업실을 꾸렸다. 작업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이야기를 주워 맞추는 과정이었다. 박 감독은 “어느 날 밤거리를 걷는데, 전단을 붙이는 엄마의 이미지가 떠오르더라”며 “장선 배우가 과거 필라테스 강사를 했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래서 그 전단이 필라테스 학원 전단이 됐고, 배우들의 삶을 하나하나 녹이며 전체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영분과 한희는 흔히 보던 보통의 모녀 이야기와 다르다. 영화는 영분에게 절절한 모성애 같은 낡은 굴레를 씌우지 않는다. 한희를 살뜰히 챙기던 영분은 자신이 엄마인 게 밝혀지자 냉담하게 돌아서서 자신을 붙잡는 딸에게 가시가 돋친 말들을 쏟아낸다. 한희가 그런 영분을 이해하고 품는다. 영화는 모녀의 이야기이면서, 두 여성의 연결에 관한 이야기다. 현실의 관계도 그렇다. 무 자르듯 딱 떨어지지 않는다. 덜컹거리는 이들의 재회는 그래서 ‘화해’와 ‘사랑’에 관한 더 큰 울림을 준다. 박 감독은 “감상평 중 가장 가슴 아팠던 말이 ‘어떻게 자신을 버린 엄마를 용서할 수 있냐’는 말이었다. ‘엄마는 이래야 한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며 “누군가가 용서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면 슬픈 사회 아니겠나”고 반문했다.

박 감독에게 영화는 ‘협업’이다. 일부러 작품 얼개를 희미하게 잡아놓고, 배우들과 진득하게 이야기 나누며 서사 뼈대를 쌓는다. “작품을 다 만들어 놓고 배우에게 미션을 주는 방식으로는 감독도 배우도 성장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다. 이번 작품에서도 정은경 장선 배우가 직접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캐릭터 설정이나 배경도 많은 부분이 배우들과의 대화에서 만들어졌다. 배우들에게 이 작품은 단순한 연기가 아닌, 삶의 일부를 극으로 표현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박 감독은 “요구가 선명하지 않아 배우들에게는 매우 힘든 작업일 것”이라면서 “조화와 생화가 다르듯이, 자연스러움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을 믿는다”고 했다.


영화사 삼순 제공


출연을 제안할 때도 배우의 전작보다는 사람을 본다. ‘재꽃’에 출연했던 배우 박명훈도 자녀 이야기를 할 때 유난히 반짝거리던 눈빛을 보고 아버지 역할을 맡기고 싶었다고 한다. 봉준호 감독이 ‘재꽃’을 인상 깊게 보고 박명훈과 ‘기생충’의 인연을 시작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바람의 언덕’을 튼튼히 받치는 정은경 장선 배우도 마찬가지다. 박 감독은 “장선 배우는 볼 때마다 밝은 인상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 분이 어떤 아픔이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역할을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며 “‘재꽃’에 이어 출연한 정은경 배우도 새 면모를 더 알아가고픈 배우였다”고 했다.

미국에서 유학하다 38살쯤 한국에 와 커피숍 운영 등 여러 일을 했었던 그는 41살에 만든 데뷔작 ‘들꽃’이 부산국제영화제는 물론 해외 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돼 주목받으면서 독립영화 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일에 대해 “마음속 만들고픈 이야기를 여행을 다니듯 풀어놓는 과정인 것 같다”고 했다. 벌써 마음속에 새 작품들도 품고 있다. 그는 “내년 봄에 제주도에서 꼭 찍고 싶은 영화가 있다”며 “구상 중인 2개의 작품을 다 찍고나면,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며 웃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