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가리 카스파로프는 ‘체스왕’으로 불렸다. 15년간 세계 체스 챔피언으로 군림했다. 그의 성공 비결은 독특한 복기(復棋)에 있었다. 시합이 끝나면 어떤 수가 왜 나빴는지 분석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수에 깔린 의사 결정 과정을 되짚어보곤 했다. 다른 체스 선수와 구분되는 카스파로프만의 “시스템 사고”였다. 카스파로프는 시스템 사고를 통해 “의사 결정 과정이나 게임 준비 루틴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생각하면서 실력을 끌어올렸고 전인미답의 성공가도를 달렸다.
만약 기업이나 국가가 카스파로프처럼 실패를 대한다면 어떨까. 예컨대 어떤 투자나 정책이 실패했을 때 일차적인 이유를 찾는 데서 한 걸음 더 내디딘다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시스템 사고는 “결과의 질”뿐만 아니라 “의사 결정의 질”도 점검하게 만든다. 이 같은 사고는 한 번의 실패에 조직이 흔들리는 일을 막으면서 실수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 만드는 요술봉이 될 수도 있다.
행운은 설계의 흔적이다
이처럼 저자는 실패했을 때 ‘과정’부터 복기할 것을 당부하는데, 미리 말하자면 이 같은 조언은 ‘룬샷’에 담긴 가장 진부한 이야기다. 가장 뻔한 조언보다 소개하는 이유는 성공 방정식의 해법을 밝히겠다는 저자의 집요한 태도가 ‘원인의 원인’을 파고든 카스파로프의 성공 비결과 닮아 있어서다. 유명한 일화를 비틀어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만드는 저자의 필력은 논픽션 작가 말콤 글래드웰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우선 책의 제목 이야기부터 하자. ‘룬샷(loonshot)’은 주창자를 “나사 빠진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대다수가 무시해버리는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예컨대 코페르니쿠스의 그 유명한 지동설도, 지구촌을 하나로 만들어버린 인터넷도, SNS의 최강자가 된 페이스북도 한때는 룬샷이었다. 룬샷을 육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점가에 차고 넘치는 경영서는 룬샷이 활기를 띠려면 도전을 북돋우는 기업 문화가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조직의 문화보다는 ‘구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가령 한때 휴대전화 시장을 점령한 노키아를 떠올려보자. 2000년대 초반까지 지구촌 휴대전화의 절반은 노키아 제품이었다. 노키아 CEO는 인터뷰에서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좀 재미나게 일해도 되고, 정도에서 벗어나는 생각을 해도 되고, 실수를 해도 되는 거죠.”
실제로 노키아 엔지니어들은 그렇게 일했다. 이들은 2004년 완전히 새로운 전화기를 만들었다. 터치스크린과 고해상도 카메라를 장착한 제품이었다. ‘온라인 앱스토어’를 만들자는 구상도 내놓았다. 한데 노키아는 제안을 묵살해버렸다. 알려졌다시피 애플은 몇 년 뒤 이 아이디어를 구현해 ‘대박’을 터뜨렸다. 노키아는 점점 힘을 잃더니 2013년 모바일 사업 부문을 매각했다.
즉, ‘터치스크린+고해상도 카메라+온라인 앱스토어’로 대표되는 휴대전화 시장의 룬샷이 노키아에서는 폐기됐고 애플에서는 육성된 셈이다. 그 차이는 기업 문화가 아니라 ‘룬샷 배양소’를 육성하고 유지하는 회사의 ‘구조’에 달렸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는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전설적 야구 경영인 브랜치 리키가 했던 “행운은 설계의 흔적”이라는 말까지 소개한다.
그렇다면 룬샷을 육성하는 구조는 어떻게 설계할까. 눈에 띄는 주장 3가지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①세 번의 죽음을 이겨내라. ②가짜 실패에 속지 마라. ③선지자가 아니라 정원사가 돼라. ①번과 ②번은 룬샷은 처음부터 각광받는 경우가 드물고, 실패처럼 보이지만 실패가 아닐 때가 많으니 주의하라는 당부의 메시지다.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은 ③번일 것이다. ③번은 리더들이 성공에 도취돼 자신을 선지자라고 착각해 “아이디어의 심판자이자 배심원”이 되려는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정원사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조직을 운영하라고 말한다. 만약 팀의 리더가 선지자인 양 행동하면 구성원은 모두 선지자의 지시만 기다릴 테니까 말이다.
‘룬샷 배양소’를 만들려면
경제경영서인 이 책이 내세우는 핵심 키워드는 ‘상전이(相轉移)’다. 상전이는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듯 물질의 상(相)이 바뀌는 지점을 가리키는 물리학 용어다. 그렇다면 상전이가 이뤄지는 경계는 어떤 모습을 띨까. 이 상태에서 얼음 조각은 인접한 물에 녹아들고, 액체 분자는 가까이에 있는 얼음 표면에 얼어붙는다. 순환 관계가 만들어지는 이 상태를 물리학에선 ‘동적평형’이라고 부른다.
물이 룬샷을 만드는 “창조적 괴짜들”이라면, 얼음은 룬샷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프랜차이즈 상품(후속작)을 통해 시장을 개척하는 자들이다. 물과 얼음, 즉 혁신과 안정이라는 두 개의 힘이 경쟁하는 동적평형 상태를 유지해야 창의성과 효율성이 선순환하는 ‘룬샷 배양소’가 만들어질 수 있다.
경제경영서에 물리학 용어까지 등장하는 이유를 살피려면 저자의 인생 궤적을 들여다 봐야 한다. ‘룬샷’을 쓴 사피 파칼은 자신을 “타고난 물리쟁이”라고 소개하는 물리학자이면서, 암 신약을 개발하는 바이오테크 기업의 CEO다.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던 시절엔 대통령 과학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과학자와 경영자 사이를 넘나든 저자의 이력이 독특한 책을 탄생시킨 셈이다.
책에는 어디서 본 듯하고 누군가 한 듯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지점이 ‘룬샷’의 가치를 크게 깎아내리진 않는다. 저자는 인류가 벌인 성공과 실패의 스토리를 한데 모아서 누구보다도 입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눈길을 끄는 이야기가 한두 개가 아니다. 1000년 넘게 지구상에서 가장 진보된 국가였던 중국이 서양에 밀린 순간을 되짚어보는 식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룬샷’이 무엇인지 일별한 내용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 한국이 일군 한강의 기적을 거론하면서 한국 학생들이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 거두는 성과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 책에 실린 아이디어들을 적용하는 데 한국만큼 최적화된 국가는 없을지 모른다”고 적었다. 한국은 ‘룬샷의 기적’을 실현할 수 있을까.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룬샷’을 “내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는 책”이라고 소개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