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문 목사
전 이랜드 사목
캐나다 트리니티 웨스턴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ty) 박사(D.min.) 과정
리차드 포스터 “현대 사회에 악마의 주무기는 소음, 서두름, 군중 세가지”
이 ‘생령’(네페쉬 하야)은 혼의 원기 회복하는 영적 DNA 숨어 있어
인간의 과학발전이 절대 영성은 제조할 수 없어
본문 :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 가시니”(눅4: 42)
전 세계의 팬데믹(pandemic) 현상이 일어나기 전까지 전세계의 최대 관심은 생명 공학(Biotech)이었습니다. 몇 해 전에는 파이낸셜 타임즈에 인간의 삶에 변혁을 줄 수 있는 기술 5가지를 선정했는데, 첫번째가 유전공학이었습니다.
영국의 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에서는 “과연 인류를 편집 할 수 있을까? (Editing humanity?)라는 말까지 등장합니다. 한동안 한국에서는 복제 동물에 성공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기도 하였습니다. 인간 복제 가능성을 언급하게 하며, 신의 영역에 인간이 도달했다고 연구 논문과 유명 매거진에 발표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서 이런 말이 가당치도 않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이 결국은 여짓까지 헛발질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이러스라는 작고 작은 보이지 않는 입자(1/10000mm)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할 말이 없습니다. 바이러스 침투에 대응하기 위해 지상 최대의 미사일 요격기라고 쏴서 명중시키면 되는데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떠드는 빌 게이츠가 이야기하든, 유발 하라리가 이야기하든, 유명 전문 잡지가 이야기하든 정답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미래예측은 불안과 두려움의 찌꺼기만 남기는 듯합니다. 심지어 바이러스의 해악으로 걷잡을 수 없는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는 듯합니다.
국민들 중 진단키트가 수출된다고 희망을 갖고 있고, 대한민국이 이 위기에서 세계의 초강대국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일전에 미국의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 한 방탄 소년(BTC)의 활약과 허리우드에서의 ‘기생충’의 아카데미 4개 부분 석권 등 매우 고무적인 현실을 가지고 너무 비약적으로 대한민국이 세계의 희망이라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문명의 주도권을 쥘만한 현실은 역부족입니다.
필자는 반문하고 싶은 것은, 1950년대는 제임스 본드 007 시리즈, 60년대 영국의 비틀즈가 나타나 전세계의 음악을 석권 할 쯤, 영국은 일본한테 경제적인 선점도 내주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도 21세기는 반지의 제왕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세계를 다시 제패하기는커녕, 빛 바랜 살구 인 듯 영국은 기운이 빠져 있습니다.
중국은 사드 배치 때문에 케이팝(K-pop)을 차단하고, 미국의 유튜브를 차단해서 14억의 인구는 지금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컨테츠를 본다 말하지만. 미국은 우리가 없었으면 지금 같이 GDP 10위의 국가가 될 수 있었냐?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 우리와 동맹을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잘못하다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판입니다. 그래서 최근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에는 노골적으로 말하길, 이 팬데믹(pandemic) 이후에 세계는 두 패권으로부터 선택해야 할 시점이라는 맺음 말을 합니다. 서서히 세계 각국의 언론은 그물로 고기를 잡기 위해서 한 쪽으로 몰 듯, 발언 수위가 심상치 않습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미래에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기하급수적인 변화”(Exponential changes)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위기의 세상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가?
미국의 가장 최근에 빌리 그레이엄 센터 중심으로 크리스천 리서치 기관에서, 1000여명의 목회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대 유행에서 앞으로의 전망은? 그 중에 54%가 불확실성(uncertainty)이라고 답했습니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기술 기반으로 한 목회(the Obstacles of technology-based ministry) 53%라고 답했습니다. 그들의 최대 관심은? 앞으로 재정적인 위기를 어떻게 극복 할 수 있을까? 57%가 응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미국에서는 마이크로 교회가 부상(the rise of micro church)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략적인 변화와 시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자주 위기가 있을 때 “잠잠히 있으라(Be still), 혹은 조용히 하라(Be quite)”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별 것 아닌 행동을 하십니다. 한적한 곳에 가셨을 뿐입니다.
‘한적한’이란 ‘고립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소란스러움을 벗어날 수 있는 장소를 말합니다. ‘가시니’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신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묵상하러 가셨습니다. 잠시 삶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십니까? 사탄은 인간이 멈춰서 있는 꼴을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그의 책 ‘일상의 치유’에서 리차드 포스터를 인용하길, “현대 사회에서 악마의 주무기는 소음, 서두름, 군중 세 가지이다. 인간이 다량 다수에 몰두하는 순간부터 사탄은 두 다리를 쭉 뻗고 쉴 수 있다” 그래서 칼 융은 “서두름은 악마의 소산이 아니라, 악마 그 자체라고 표현 합니다. 서양 속담에도 “서두르는 것은 낭비이다”(haste makes waste)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인간의 뇌에서는 시계 소리가 박동 소리처럼 크게 뛰고 있습니다. “서둘러라” 합니다.
시간은 돈이라고 다그치면서 소리 칩니다. 마치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게 하는 법만 배웁니다. 멈출 수 없는 폭주 기관차처럼 달리기만 합니다. 멈출 까봐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의 병을 달고 다닙니다.
요한계시록 17장 3절에 “곧 성령이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크리스천이면서도 불구하고, 혹시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처럼 살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크리스천들은 일상에서 이기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일상의 삶에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것처럼, 마가복음 6장 31절에, 제자들에게도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현대인들이 가장 못한 것이 바로 쉼입니다. 흔히들 쉴 때는 게임에, 잠으로 보충합니다. 이 쉼은 그런 쉼과 다릅니다.
이 위기에서 크리스천들이 살 수 있는 핵심 중에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호흡. 바람)를 그 코에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이 된지라." 하나님은 생령을 인간에게 집어 넣으신 것입니다. 이 ‘생령’은 하나님의 핵심 칩인 영적 DNA입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마시면 영성(spirituality)이 일상에서 생깁니다. 영성은 수동적인 영성(passive spirituality)과 능동적인 영성(active spirituality)이 있습니다. 수동적인 영성은 교회를 중심으로 참여하는 영성입니다. 반면에 능동적인 영성은 나와 하나님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주목해야 할 것은 한적한 곳으로 “가시사”입니다. 능동적인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가셨습니다. 회당으로 가시지 않고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입니다. 짐 싸 들고 들어가는 기도원 영성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일상의 능동적인 영성의 습관화입니다.
이 생기에는 하나님의 씨가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15: 31)
영혼의 호흡을 하는 시간은 천국의 씨를 심는 시간 입니다. 이 씨를 겨자 씨라 하였지만, 아주 작은 겨자씨인 생령이 내 안에 존재 하며, 자라기 시작합니다.
수박 씨가 흙을 뚫고 나오려면 40만 배의 에너지(힘)가 있어야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신비 자체입니다. 흙을 뚫고 나오는 것이 보이십니까? 마찬가지로, 이 쉼의 시간은 생령의 씨를 심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신비의 능력을 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겨자씨(1그램, 750개 정도의 량)가 자라는 것을 눈 씻고 아무리 보아도 알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쉼’을 얻는 다는 의미는 나의 영혼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육체에 좋다는 것은 다 탐 하면서, 다들 공기 좋은 곳을 찾아 다니는데, 하나님의 생기를 얻기 위하여 쉼을 갖는 것은 너무 게을리 하고 소홀히 합니다.
스가랴 4장 10절에, “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하고 하십니다.
혹시 작은 것이라서,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돈이 안 되어서, 이 쉼의 시간을 멸시 하십니까? 그럼 이렇게 이야기 할까요? 돈이 엄청 생기는 일입니다 라고 말하면 기를 쓰고 할까요? 이 쉼의 시간을 멸시 하지 마세요. 축복이 왕창 들어 옵니다. 아마도 돈만 빼고 들어 올 수도 있습니다.
겨자씨가 우습게 보이십니까? 그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이지만, 장정 키의 3배정도까지 자라란다고 합니다. 또한 영혼의 호흡의 시간을 통해서 그분의 생령인 믿음의 씨가 내 안에 자라서 도구(Instrument)가 됩니다.
모세에게는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물 맷돌이 되었습니다. 삼손에게는 당나귀 뼈가 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에게는 밧줄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손에 들려 진 것을 통해서 세상에서 마음껏 휘두르게 하십니다. 이 도구를 통해서 역사를 바꾸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신명기 8장 3절에, 광야에서 직접 요리사가 되셔서 만나 라는 특별 식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공하십니다. 더욱이 광야에서 하나님은 거주가 자유롭도록 구름 기둥으로, 잠자리도 안락하게 불기둥으로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모든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생기와 같은 것입니다.
이 생기에는 열정이라는 불도 담겨 있습니다. 작은 씨가 내 영혼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사소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탁월함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일상을 치유도 하십니다. 작은 일의 가치를 우습게 여겼다가는 큰 코 다칩니다.
아무리 인간의 과학의 발전이 절대로 영성(spirituality)은 제조 할 수 없습니다. 21세기에는 영성은 최고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왜냐 구요? 아무리 탁월한 과학자라도 이 영역은 편집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전자 변형의 최고 정점에 왔다 해도 하나님의 영은 만들 수 없습니다. 문명의 주는 편리함(convenience)는 인간의 감성과 지성까지는 터지 할 수 있어도, 인간의 영혼까지는 터치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공허함과 고립과 악함이 더욱 가중 될 것입니다.
지금 펜데믹(pandemic)에서 거의 벗어났다고 안심은 아닙니다.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는 듯합니다. 이 전염병과 함께 성경은 기근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근이란, 경제적인 위기이기도 합니다. 다시 백신과 치료제가 없는 이상, 전염 병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삶의 진정한 하나님의 스토리를 찾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루에 30분이라도 하나님과 골방 스토리 여행을 하신다면요?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충전하시는 시간입니다. 충전할 때는 절대 시동을 키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