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KBS에서 예능만 14년을 만들어온 원승연 PD는 웹예능에 도전하면서 관성부터 버렸다. “베테랑이잖아요” 칭찬에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답했다. “예능을 잘 안다는 생각부터 내려놨어요. 끊임없이 배우고 실험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도전의 시작은 KBS 최초의 웹예능 ‘구라철’이다. 14년 차 원 PD가 생각하는 웹예능을 20일 물어봤다.
스마트폰 대중화로 콘텐츠 소비 패턴이 변화하고 있다. 유튜브-SNS-모바일을 중심으로 영상 소비 방식이 재편됐고, 숏폼(Short-form) 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 숏폼은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 OTT(Over-the top) 서비스를 중심으로 주류로 떠오른 짧은 영상이다. 효율적인 소비를 중시하는 젊은 취향을 반영해서 길어도 20분, 그 안에 스토리를 담아야 한다.
시작부터 참신했다. TV 예능을 알 만큼 아는 14년 차 예능PD가 전통미디어의 상징인 공영방송 KBS에서 선보이는 가장 최신 유행 콘텐츠라니. 유튜브에 지난 2월 14일 첫 영상을 올린 웹예능 ‘구라철’은 ‘KBS답지 않은 KBS 프로그램’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2달여만에 구독자 10만명에 육박했다.
원 PD는 “예능을 만들면서 버려지는 영상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며 “정작 재미있는 부분은 방송에 내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약도 많고 심의 기준도 높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답답하지 않은 플랫폼에서 예능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며 “처음부터 유튜브를 공략한 것은 아니고, 현재 가장 잘 되는 플랫폼이기 때문에 선택했다. 계속 변화하는 플랫폼을 공부하고 따라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지금까지는 TV에서 인기를 모은 프로그램의 뒷이야기를 확장해 유튜브에 공개하는 식이었다면 ‘구라철’은 반대다. 온라인에서 시청자의 선택을 받으니 오히려 TV에서 역으로 편성 제안이 왔다. 일단 이달 25일과 다음 달 9일 KBS2에서 밤 10시30분에 방영키로 했다. 이걸 노렸을까? 아니다.
“웹 예능을 홍보하려고 TV를 이용하는 거예요(웃음). 더 웹스럽고, 웹다운 ‘구라철’을 만들기 위해서요”
유튜브 등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으로 PD들의 고민도 깊어졌다. 시청 방식과 감상 포인트가 바뀌면서 도전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 예능의 핵심 키워드는 ‘캐릭터’다. 여러 연예인이 나란히 앉아 각자 캐릭터를 유지하며 극을 이끌었던 흐름에서 한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 캐릭터로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는지 초점이 맞춰졌다. 답은 1인 크리에이터 방식이다. 유튜브나 아프리카의 1인 BJ 혼자 여러 상황을 이끄는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구라철’도 출연자 김구라 혼자 끌어간다.
원 PD는 “김구라와 친분이 있어 사담을 나누다 보면 ‘이런 것까지 알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이걸 콘셉트로 김구라가 이끌어가는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구라철’의 소재는 지하철과 질문 딱 두 가지다. 시청자가 궁금해 하는 모든 질문을 김구라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대신해주는 콘셉트다. 원 PD는 “지하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유는 어디든 다 갈 수 있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라며 “아주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복잡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겠다 싶었다”고 설명했다.
제작진부터 줄였다. TV 프로그램의 경우 카메라 여러 대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민과 소통하는 방송에서 이런 점은 부담으로 작용해왔다. 시민은 어마어마한 제작진과 장비에 위축됐고, 경직됐다. 웹예능이 그래서는 안 됐다. 위화감을 없애고 자연스러운 모습 담아내기 위해 촬영팀을 줄였고, 현재는 카메라 딱 두 대만 들고 촬영에 나선다.
대신 대학생 인턴 2명을 고용했다. 원 PD는 “웹예능은 젊은 감각이 필요하다”며 “14년간 예능을 만들어왔지만 지금은 이 친구들에게 배우고 있다. ‘내가 더 잘한다’는 마인드를 모두 버렸다. 기존의 일하는 방식 대신 대학생의 젊은 유머코드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원 PD가 가장 고민하는 지점은 타깃이다. 유튜브 이용자 중 50대 이상이 많다고 해도 이들이 유튜브로 예능을 보지는 않는다. 원 PD는 “시청 패턴을 분석해보니 남성과 여성의 비율은 8대 2로 남성이 현저히 많았고, 연령층은 25~34세가 가장 높았다. 그다음은 35~44세 남성이었다”며 “25~44세 남성이 김구라다운 것을 좋아하는 주 타깃층이라는 결과를 얻었고, 일단 구독자 10만명을 넘어설 때까지는 이 타깃층에 맞는 아이템을 찾고 연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목표는 15~24세 여성에게 어필 할 수 있는 콘텐츠”라며 “유튜브에서 이 타깃층을 선점하지 못하면 장기적으로 끌어갈 수 없다. 단발성이 아닌 누구든 즐길 수 있는 프로를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원PD가 인터뷰 중 가장 많이 한 말은 “공부하겠다”였다. 유행은 빠르게 변하고, 플랫폼은 눈 깜짝할 사이 생기고 또 없어진다. 예능판에서 살아남으려면 그에게 공부는 필수였다.
“예전에는 콘텐츠를 잘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면 지금은 열심히 만든 콘텐츠를 시청자에게 어떻게 잘 도달시킬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어요.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콘텐츠는 포화상태예요. 피나는 노력 없이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던 TV에게는 위기인 거죠. 방송가 PD들이 고민해야 할 시점 같아요. 온라인은 더 이상 서브컬쳐가 아니에요. 계속 공부해야죠”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