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들이 더 잘 보는’ 마음보듬사… 새 직업 만든 서울대생들

입력 2020-04-19 17:27 수정 2020-04-19 20:04
'블라인드 마음보듬'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울대학교 동아리 '인액터스' 소속 '봄그늘 협동조합'의 조은기 대표와 서돈향씨, 한아름씨와 '마음보듬사'로 활동 중인 시각장애인 이선희(가명)씨가 지난 16일 서울 강남역 인근 한 공유라운지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한씨, 조씨, 이씨, 서씨. 최현규 기자

서울대생인 김지은(가명·24·여)씨는 평소 주변에서 학업과 동아리 활동을 탁월하게 병행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김씨는 지난해 처음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하느라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김씨가 속마음을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곳은 서울대 학생들이 만든 ‘봄그늘 협동조합’이 시각장애인과 함께 운영하는 ‘블라인드 마음보듬’ 서비스였다. ‘베프’(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한 적 없던 속내를 털어놓으며 울먹이던 김씨를 다독인 건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들리는 “괜찮아요”라는 목소리였다. 김씨는 19일 “내 표정을 상대방이 전혀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더 솔직하게 내 얘기를 꺼내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블라인드 마음보듬’ 서비스는 빛을 완벽히 차단한 공간에서 시각장애인이 일반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서비스다. 서울대학교 소셜벤처 경영학회 ‘인액터스’가 만든 봄그늘 협동조합이 2018년부터 서울 강남역과 서울대입구역 인근의 공유 라운지에 전용공간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

방식은 간단하다. 빛을 완벽히 차단한 공간에서 내담자는 50분 동안 ‘마음보듬사’로 불리는 시각장애인과 대화를 나눈다. 마음보듬사는 상담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전문상담사에게 80시간 이상 이론과 실습교육을 받고 투입된다. 지난해에는 마음보듬사 자격증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민간자격증으로 정식 등록됐다. 현재까지 250여명이 이 서비스를 이용했고, 최근 입소문이 나면서 예약자가 늘어나고 있다.

전문적인 상담은 아니지만 마음보듬사들은 내담자가 솔직하게 내면을 드러낼 수 있도록 경청하며 공감을 전한다. 서울대 불어교육과 학생인 협동조합 대표 조은기(24)씨는 “환한 조명 아래서 이뤄지는 전문가와의 심리상담은 자신이 실험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마음보듬 서비스에서는 편하게 본인 얘기를 꺼내게 된다는 내담자들의 후기가 많다”고 전했다.

조 대표 등이 이 서비스를 시작한 것은 시각장애인의 직업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20여년 전 시력을 잃고 지금은 주6회 마음보듬사로 일하는 이선희(가명·47·여)씨는 “시각장애인이 된 후 주로 안마사 직업훈련을 받았는데 적성과 맞지 않아 힘들었다”며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훨씬 적성에 맞아 즐겁다”고 했다.

이씨는 “지인과 가족들도 굉장히 만족한다”며 “마음보듬사로 일하며 올해 어머니께 처음으로 용돈을 드린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씨는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이 비장애인에 비해 훨씬 예민하기 때문에 내담자의 목소리만 듣고도 마음 상태를 알아차릴 때가 많다”며 “나중에 상담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협동조합 소속 학생들도 시각장애인을 도와줘야 할 대상이 아닌 동등한 주체로 바라보게 됐다고 말한다. 언론정보학과 학생인 서돈향(24·여)씨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장애인들은 봉사의 대상이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라며 “친구들이 ‘좋은 일 한다’고 칭찬하면 이젠 위화감이 든다”고 말했다.

김지애 기자 am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