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웠다. 40세가 되던 1910년 일제에 나라를 강제점령 당하는 경술국치를 보았다. 이때의 충격은 그의 삶에 큰 변화를 주었던 거로 보인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의학을 연구해 1914년 의생면허를 취득했다. 한의사가 된 것이다. 그 후 5년간 의술 활동에 전념했던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그 후 동지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는데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도산 안창호 앞에서 평생을 조국독립에 바칠 것을 맹세한 이야기다. 그 후 이원직은 조국 독립운동에 대한 진정성과 신념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밀연락기관인 교통국(交通局)의 국내 교통 연락원이 됐고, 동지 이기하(李起夏)와 더불어 서울 교통국 참사에 임명됐다. 참사는 매우 높은 직위였다. 외무직 공무원 즉 외교관 중에서 공사 바로 아래 직책이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의생면허를 취득한 뒤 그의 5년여의 삶은 분명 경술국치에 크게 영향을 받은 거로 보인다.
교통국 참사에 임명된 이원직은 독립운동 동지 김청풍(金淸風), 정의도 등과 함께 황해도 사리원과 서울 사이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임시정부의 주요 문서, 독립신문, 임시정부 공보, ‘신한청년’등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인쇄물을 비밀리에 국내에 배포, 선전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와의 기밀문서 및 군자금을 전달했는데,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면서 임시정부 발행 독립공채 매각에 탁월한 공적을 남겼다. 그러나 결국 군자금 모금을 위해 부호의 집을 자주 출입하다가 그 활동내용이 일본 경찰에 탐지돼 체포당했다. 이때가 1919년 6월이었다. 2년여의 재판이 이루어졌고 그사이 임시정부의 요원과 위치를 알아내기 위한 일제의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이원직은 1921년 8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1923년 6월에 가석방됐다.
석방된 독립운동가는 곧바로 일제의 요시찰명부에 기록됐다. 갑-을-병-정으로 나누어진 문서에 그들의 이름, 본적, 죄명부터 몇월 며칠 누구와 어디서 만났는지 등 일거수일투족이 다 적혔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는 못했지만, 암암리에 독립운동가들을 도운 기록이 있으며,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한국 상륙에 대비해 모종의 비밀공작을 추진하다 같은 해 12월 3일 용산에 주둔하던 일본군 헌병대에 다시 체포됐다.
이원직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수용되었고 잔혹한 고문과 심문조사를 받다 1945년 5월 3일 광복을 3개월여 앞두고 옥사 순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75세, 당시 평균수명과 인구통계학적 비교에 의하면 오늘날 95세가 넘는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고문을 받고 사망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내용은 비밀에 부쳐져 일절 발표되지 않았다. 광복 후 약 20년이 지나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원직 한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정상규 작가는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통해 숨겨진 위인을 발굴해왔다. 현재 ‘국가유공자 지원 시민단체 포윅스’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독립운동 맞습니다’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