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다큐소설] 청계천 빈민의 성자(19): 일본 전시대피 훈련

입력 2020-04-17 09:30 수정 2020-04-17 10:08
註: 예수와 같은 헌신적 삶을 살고자 1970년대 서울 청계천 빈민들과 함께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노 선생)와 빈민운동가 제정구 등이 겪은 ‘가난의 시대’. 그들의 삶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인류 보편적 가치 그리고 한국 교회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큐 소설이다.
1970년대 초 서울 청계천 변 아이들. 교회 주일학교 선생의 율동에 맞춰 아이들이 따라하고 있다. ⓒ 노무라 모토유키

“같이 놀자.”
“됐어. 우리끼리 놀 거야.”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운동장 한구석에 쓸쓸하게 앉아 있는 조선인 아이들에게 가서 같이 놀자고 말을 건넸다. 하지만 두 아이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들로서는 일본 아이가 같이 놀자고 하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손에 쥔 흰 고무공을 내밀어도 아이들은 슬쩍 눈길만 줄뿐 놀려고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일본은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전국 소학교(초등학교) 학생에게 고무공을 나누어 주었다. 정구공으로 불리는 말랑말랑한 공은 야구공 크기였다. 한데 각 반에 1~2명씩 있는 조선인 학생에게는 그 고무공을 지급하지 않았다. 식민지 백성인 ‘조센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내가 그때 놀자고 했던 조선인 중 한 아이는 박 원장 혹은 박원자로 기억한다. 다른 한 명은 성씨조차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두 친구는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했다. 그러니 나름 리더십이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반의 대표는 되지 못했다.

앞서 일본은 1937년 중일 전쟁에 이어 1941년 소위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을 점령했다. 중일 전쟁으로 전쟁 물자가 부족해지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략했다. 특히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미군 기지를 기습해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전선을 확대했다.

내가 소학교 시절 일본 국민은 전시 체제 규율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내가 다니던 소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시 대피 훈련은 기본이었고, 황국신민으로서 책무 등을 학습해야 했다.

전리품으로 나눠준 고무공을 조선인 아이들에게만 주는 않는 학교의 처사는 어린 내 눈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우울한 마음이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 배경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과 놀아주는 것이 다였다. <계속>

작가 전정희
저서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한국의 성읍교회’ ‘아름다운 교회길’(이상 홍성사), ‘아름다운 전원교회’(크리스토), ‘TV에 반하다’(그린비) 등이 있다. 공저로 ‘민족주의자의 죽음’(학민사),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청한)가 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