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은 목사
서울 마라나타 교회
본문 : 죄짓다가 현장에서 끌려온 여자 (요 8:1~11)
한 여자가 죄를 짓다가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께 끌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있는데 사람들 손에 붙잡혀서 그 앞으로 질질 끌려 왔습니다.
머리채는 다 풀어지고 눈물 범벅이 된 얼굴과 옷이 흙먼지와 뒤엉켜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알고 보니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그대로 끌고 온 것입니다.
죄를 짓는 도중에 잡혀 왔으니 꼼짝없이 벌을 받아야 합니다.
법대로 하면 돌로 맞아서 죽게 된 것입니다.
죄인 여자를 향해서 모여있는 사람들이 돌을 손에 하나씩 쥐고 곧 던질 기세입니다.
죄인 에게 벌을 주는 살기등등하고 살벌한 현장입니다.
하나님은 천벌을 내리셔서 죄에 대한 벌을 주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법대로 하면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하니 예수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죄지은 여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게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이 수치심보다 더한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죄인 여자의 눈과 마주 치셨습니다.
그 여자는 정말로 불쌍하다는 말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여자 입니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요...
한때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귀한 딸이었을 텐데 죄를 짓고 나니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죄인의 신분이 그렇게 처참합니다. 죄는 사람을 이리도 비참하게 전락시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나지막한 예수님의 한마디에 갑자기 살벌하던 현장이 숙연해 집니다.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의 양심을 건드리니 이 말씀을 듣고 하나씩 하나씩 슬쩍 그 불편한 자리를 피해서 나갑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셨나요?
이것이 죄인을 대하시는 공정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이것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죄에 대한 계산법입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과 살인은 같다, 마음에 음란을 품는 것과 간음은 같다.”
이것이 정확한 하나님의 계산입니다.
그렇다면 사람 중에서 누가 죄인이며 누가 의인이겠습니까? 모두가 죄인 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큰 죄 작은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같은 죄이지요,
한번도 죄를 마음에 품지 않은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은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죄인들 끼리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사람은 사람끼리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할 수 없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죄를 벌하려던 그 자리에 아무도 없고 예수님과 죄인 여자 둘만 있습니다.
이것이 맞는 것입니다. 심판의 자리에서는 아무도 없어야 합니다.
오직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죄인 여자만 있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판결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용서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심판자가 말씀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않는다.”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죄를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던가요?
그 분 앞에서 나의 죄 때문에 두려워서 하나님을 피했던 것 아닙니까,
너 왜 그렇게 밖에 못살아, 너왜 그렇게 밖에 못해?
기회만 엿보아서 나를 벌주시려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인줄 알고 피하고 싶었는데,
저런 엄청난 죄인 여자를 죄인으로 규정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을 들은 죄인 여자는 갑자기 그 자리 에서 오열을 합니다.
그 말이 깨달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용납하시고 받으셨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구나, 이것이 사랑 이구나.’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가 알아지니 감당 할 수 없는 그 사랑 앞에서는 통곡합니다.
자기의 죄를 용서받은 것을 아는 사람은 용서하신 것이 사랑 인 것도 압니다.
이 큰 사랑 앞에서 또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지을만한 강심장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걸로 이미 용서가 증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