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인도분 아시아수출 원유 3월보다 10달러 싸게
미국 셰일오일 업계 겨냥한 점유율 전쟁
국내 정유사들 하반기 영업이익 ‘대박’ 예상도
우여곡절 끝에 지난 12일 타결된 OPEC+(OPEC과 10개 주요 산유국의 연대체)의 최대규모 석유 감산합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재력이 빛을 발했다는 자화자찬이 이어졌다. 게다가 미국은 하루 970만배럴 감산 쿼터에도 강제 배정되지 않는 수확을 거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줄어든 자연감소분만 감당하는 식으로 얼버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유전쟁이 여기서 끝난 것 같지 않다. 감산 합의 하루 뒤인 지난 13일 사우디아라비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승부수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한달 전 감산을 거부한 러시아에 맞서 증산 선언으로 전쟁을 선포했다면 이번엔 노골적으로 미국을 겨냥한 가격인하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이 덕에 그동안 원유가 폭락에도 불구하고 휘발유값 인하폭에 인색하다는 비난을 들었던 국내 정유업계는 원유 가격까지 할인 받는 어부지리까지 챙기게 됐다.
14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사우디의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13일 아시아로 수출하는 대표유종인 아랍경질유 5월 인도분의 공식판매가격(OSP)을 벤치마크 유종인 오만·두바이유 평균 가격보다 배럴당 7.30달러 낮은 가격에 책정, 발표했다.
이는 4월 인도분의 할인폭보다 4.2달러나 낮은 가격이다. 2001년 이후 최저치다. 지난달 OSP가 오만·두바이유 가격 대비 2.9달러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2개월 전에 비해서는 무려 10.2 달러나 싼 값에 내놓은 셈이다.
사우디가 가격할인 정책을 들고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KB증권 보고서는 14일 “사우디가 원칙적인 감산에는 동의하지만 가격할인을 통해 원유 시장의 점유율 상승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특히 하필 2015년 이후 미국산 원유 비중이 높아진 아시아 수출 원유 OSP를 대폭 낮춘 점이 예사롭지 않다.
이 가격은 미국산 원유대비 배럴당 5~6달러 낮은 수준으로 추정되는데 미국 셰일석유 업계와 이 지역에서 한판 붙어보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015년 이후 미국에 최대 산유국이라는 명예를 빼앗긴 사우디는 시장 점유율을 높여서 석유가격 책정권을 손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5월 북서유럽 인도분 아랍경질유의 OSP를 4월과 같게 유지하고 미국 인도분을 아거스고유황원유지수(ASCI)보다 배럴당 0.75달러 할인해 4월보다는 할인폭을 배럴당 3.00달러 높인 점은 사우디의 속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5~6월 전세계 원유수요의 10%나 되는 970만 배럴 감산 결정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사태로 인한 수요급감세를 감안하면 아직 이 정도로 그 동안 떨어진 가격을 만회하는데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런 우려 속에 사우디의 가격인하 정책은 새로운 갈등의 불씨를 남긴 셈이다.
하지만 모든 정책결정엔 이득을 보는 쪽도 있게 마련이다. 사우디의 이같은 가격도발로 한국의 정유업계가 본의 아니게 수혜자로 떠올랐다. KB증권은 “과거 2~3년 동안 낮은 원유가격을 통해 원가경쟁력을 보였던 미국 정유기업 대비 한국 정유기업의 기업가치 제고가 예상된다”면서 도입 원유가 하락을 통해 하반기부터 큰 폭의 수익성 상승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지난해 연평균 아랍 경유 OSP는 1.9달러로 올해 평균 OSP를 전년 대비 3달러 정도 하락한 -1.1달러로 가정한다면 한국 정유사 4곳의 영업이익은 1조8000억원 가량 늘어날 전망이라고 보고서는 추산했다. 한국의 화학기업들도 낮아진 국제유가로 인한 나프타 가격 하락으로 미국과 중국의 에탄분해설비(ECC) 및 석탄화확 대비 원가경쟁력을 보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내 소비자들은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과 사우디발 전쟁 선포까지 겹쳐 국제 원유가격이 절반 이상 급락했음에도 정작 국내 판매 휘발유 가격은 10% 안팎으로 ‘찔끔’ 인하하는데 그치고 있다며 정유업계의 폭리 의혹을 제기해왔다.
이에 대해 정유업계는 휘발유에 붙은 각종 세금 비중이 60%나 돼 가격 인하 폭이 작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해명했다. 게다가 코로나 사태로 인한 달러가격 상승과 국내 가격반영에 2~3주 시차가 발생하는 것도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