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감산 합의가 잠정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정유업계의 시름은 여전하다. 원유와 석유제품 보관 공간 부족으로 정부 비축시설을 빌리는 상황에서 하루 1000만 배럴 감산으로는 시장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워서다. 초과 공급에 수요 위축, 정제마진 악화 등 계속되는 악재에 1분기 정유업계 적자가 3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2일 글로벌 원자재 기업 트라피규라에 따르면 이번달 세계 석유 수요 감소폭은 하루 3000만 배럴로 추정된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IHS 마켓도 일일 석유 수요 감소량을 2000만 배럴로 추정했다. 지난 9일 OPEC+(석유수출국기구인 OPEC과 10개 주요 산유국 연대체)가 잠정 합의한 일일 감산 1000만 배럴은 수요 감소폭의 30~50%에 불과하다.
이미 국내 정유사는 수요 급감으로 인한 재고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가동률을 낮추는데 이어 정부 비축기지 대여에 들어갔다. 지난 9일 한국석유공사는 국내 정유사들에 비축기지를 대여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SK에너지는 서산 석유 비축기지에 180만 배럴을 저장할 예정이다.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는 원유 및 석유제품 저장을 위해 정부와 세부 조율을 시작했다. 에쓰오일은 자체 보유 중인 저장기지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석유공사가 보유 중인 비축 시설 규모는 총 1억 3600만 배럴로 이 중 현재 사용 가능한 용량은 약 4000만 배럴이다. 업계 관계자는 “석유는 계속 들어오고 제품은 계속 만들어지는데 저장할 공간이 없다”고 토로했다.
쌓이는 재고는 1분기 실적에도 악재로 작용했다. 원유 가격이 1달러 움직이면 70억원의 재고평가 변화가 발생한다. 지난 2월 20일 배럴당 56달러를 기록했던 두바이유가 지난 9일 23달러까지 하락했는데 이같은 유가 급락에서 2310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업계는 재고평가손실의 영향으로 총 3조원에 이르는 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나금융투자는 1분기 SK이노베이션의 영업적자가 1조800억원, 에쓰오일의 영업적자가 7887억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양지환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현대오일뱅크의 1분기 영업적자가 4782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한승재 DB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GS칼텍스가 1분기 5840억원의 영업적자를 내 적자전환할 것으로 전망했다.
정유사는 원유 계약을 최대 20년의 장기로 체결해 공급 안정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이같은 장기계약이 수요가 급감한 상황에서 독이됐다. 수요는 줄었는데 원유는 계속 들여와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에 정유사들은 가동률을 낮추고 정기보수 일정을 앞당겼다. SK에너지는 울산 원유공장 가동률을 85%까지 낮췄다. 이는 2017년 2분기 이후 최저 수준이다. 현대오일뱅크는 하루 36만 배럴의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대산 제2공장의 정기보수를 지난 8일 시작했다. 보수는 다음달 22일까지 이어진다. GS칼텍스도 하반기 예정이던 여수공장의 정기보수를 지난달 중순 시작했다.
유가 급락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수요 위축에 업계는 당황한 분위기다. 감산 합의는 원만하지 않은 상황에서 코로나19는 지속적으로 확산돼 상황은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가 사그라들어도 단기간에 수요가 반등할 요인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권민지 기자 10000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