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태워야 해” 여성주의 록뮤지컬 ‘리지’

입력 2020-04-12 16:55
록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1892년 어느 미친 여름날,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작은 도시 폴 리버 보든 가의 부유한 사업가 앤드류와 그의 새로운 부인 에비가 집안에서 잔인하게 도끼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둘째 딸 리지. 세기의 재판이 열리고 4명의 여인이 법정에 선다. 리지, 그의 언니 엠마, 리지의 친구 앨리스, 보든 가의 메이드 브리짓.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 속에 재판은 반전을 거듭한다. 사실과 소문이 뒤섞인 채 다양한 서사로 변주되고 있는 리지 보든의 이야기. 과연 그날 보든 가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국내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신작 라이선스 뮤지컬 ‘리지’는 미제 살인 사건인 ‘리지 보든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1990년 단 4곡의 넘버로 이뤄진 실험극으로 시작한 뒤 20년간 작품 개발을 거쳐 2009년 뉴욕에서 초연했다. 등장인물은 딱 여성 4명. 무대에 오로지 여성만 서는 공연은 흔하지 않다. 시대적인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사자후는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이들은 ‘여자가 감히’ ‘딸이 어떻게’ 같은 시선 속에서 고개를 들고 힘껏 외쳤다. “XX, 다 X 까!”

록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록으로 표현한 여성들의 연대

미국 역사상 대표 미스터리로 불리는 118년 전 벌어진 ‘리지 보든 사건’은 많은 예술적 영감을 제공했다. 책,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됐는데, 지난해 영화 ‘리지’부터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 특히 중점을 뒀다. 여성주의로 해석한 이번 뮤지컬도 미제 살인사건의 진실보다 사건에 얽힌 여성들의 연대에 초점을 맞췄다.

록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 시대에서 특권층으로 살아온 엄한 아버지 앤드류는 아들을 원했다. 딸 엠마를 낳았는데 또 리지가 태어나자 낙담했다. 하지만 돌연 리지에게 “이젠 딸이 좋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하는 리지는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리지의 정신과 신체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늦은 밤 침실로 찾아갔다. 성적 학대를 일삼는 추악한 아버지와 이를 방관하고 재산을 노리는 비열한 계모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리지와 엠마는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계획을 세우려 엠마가 집을 잠시 비운 동안 리지는 도끼를 집어 들었다.

리지의 변화에는 비둘기가 있었다. 그는 다락방에서 비둘기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사랑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은 행동을 용납하지 않았고, 리지의 친구였던 비둘기들을 모두 도끼로 내리쳐 죽였다. 비둘기는 자유롭게 어디든 날아다니고 싶었던 리지가 이입한 대상이었다. 리지는 스스로 비둘기가 되기 위해 도끼를 쥐었다. 이 때 브리짓은 리지에게 부모의 하루 스케줄과 동선을 은근슬쩍 흘리거나, 증거를 은폐하는 등 범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집으로 돌아온 엠마는 도끼 자국이 선명한 아버지의 시신을 보고 리지에게 “왜 경솔하게 굴었냐”고 따져 물으면서도 동생을 꼭 껴 안았다. 마치 축제라도 열린 듯 기쁨에 겨워 춤을 췄다. 이들은 “낡고 썩은 것은 모두 없애야 한다”며 피가 묻은 리지의 드레스와 아버지의 유언서를 불태웠다. 시대적 악습을 끊어내고 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을 바랐다.

록뮤지컬 '리지'의 한 장면. 쇼노트 제공

당시 여자들은 감히 남자에게 맞설 수 없었다. 더욱이 친부에게는 절대 복종해야 했다. 억압됐던 여성들은 대반란은 모의했고, 이 과정에서 웅장하고 경쾌한 록음악과 화려한 퍼포먼스는 억눌렸던 시대적 관습을 깨는 것 같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록음악은 리지의 반항심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장르였다.

변화는 외형적으로도 섬세하게 표현됐다. 4명 모두 1800년대 후반 중세풍 드레스를 입었다가 각각의 서사를 거치면서 파격적으로 변했다. 1부 후반부터 이들은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몸에 밀착되는 짧고 강한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가죽 자켓과 망사 스타킹, 하이힐과 풀어헤친 머리에는 이들이 외치는 자유와 가부장적인 사회에 반항하는 심리가 녹아있었다.

무대와 조명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빅토리안 시대의 문양으로 이뤄진 노출 프레임구조에 투명 LED를 적극 활용해 소극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2층 구조로 짜인 무대는 여성을 옥죄던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듯 쇠창살으로 둘러싸였다. 내내 푸른 빛이 감돌던 무대는 리지가 손에 도끼를 쥐고 있을 때는 오묘한 보랏빛으로, 온몸에 피를 묻히고 나타났을 때는 강렬한 붉은 빛으로 변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