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비건의 군훈련소 생존기 [인터뷰]

입력 2020-04-11 08:00

군대에서 채식을 하는 건 가능할까. 각종 회식과 모임이 빈번한 대한민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사는 건 쉽지 않다. 하물며 군대에서라면 어떨까. 치킨 한조각에 이성을 잃게 만든다는 군대 ‘짬밥’을 먹으면서 채식주의자로 살아남는 건 가능한 일일까.

여기 군훈련소 한달을 비건으로 버텨낸 사람이 있다.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마치고 현재는 서울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 중인 이규영(24)씨. 그는 지난 2월 20일부터 지난달 19일까지 28일 동안 약 80끼니를 훈련소에서 해결했다. 국민일보는 지난달 24일 이씨와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채식선택권이 없는 군대에서 비건은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행동 통일이 중요한 군대에서 혼자 비건으로 튄 그가 혹여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닐까. 궁금증이 많았다.

비건 5년차인 이씨는 “초기에 맨밥에 김치로 버티다가 동료 소대원과 군 간부 등이 챙겨둔 두유, 바나나, 김 덕분에 버텼다”며 “나는 운이 좋았지만 하루빨리 군대에서도 채식을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그가 전한 28일간의 생존기다.

*비건이란 육류·해산물·유제품 등이 함유된 동물성 식품을 먹지 않으며, 동물을 착취해서 얻은 의류, 화장품 등 생필품의 사용을 지양하는 삶의 방식이다. 예컨대 꿀은 곤충을 착취해서 얻은 물질이므로, 꿀이 들어간 식품이나 화장품도 취급하지 않는다.

이규영씨 제공

-훈련소 급식을 먹을 수 있었나

“원칙적으로 비건식을 하려면 맨밥만 먹어야 했다. 훈련소에서 나오는 반찬은 제육볶음, 불고기, 소시지볶음, 생선조림 등 고기, 해산물 위주였다. 국이나 탕에는 사골육수나 멸치, 해산물 육수가 들어가서 먹기 곤란했다. 매일 나오는 김치 또한 젓갈이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첫 20~30끼니 정도는 쌀밥에 김치만 먹으며 버텼는데, 예상대로 속이 쓰라리고 과한 허기를 느꼈다. 결국 현실과 타협을 했다. 동물성 식재료가 들어간 음식이더라도 채소만 건져 먹는 방식으로 바꿨다. 그나마 1주일에 두세 번 나오는 조미김이 많은 도움이 됐다. 포장 하나당 껌종이 크기로 8장 묶음이 들어있었는데, 김이 너무 작고 얇아 2~3장은 씹어야 맛이 느껴졌다. 배식에 김이 나올 때마다 동기들이 10여장씩 챙겨줬다. 군데리아(군대+롯데리아) 배식 날에는 우유·계란이 들어간 빵, 햄, 치즈, 샐러드, 삶은 계란 그리고 시리얼과 우유 두 팩이 제공됐다. 유제품 성분이 들어간 시리얼 과자와 약간의 샐러드만 먹는 것이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부식으로 나오는 감자 과자·건빵·초코바 등에도 계란·우유가 들어간다. 하지만 치즈 같은 눈에 보이는 덩어리가 없고 우유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경우에는 먹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었다. 가끔 식당에서 바나나, 딸기 등 과일이 나오면 동기들이 안 먹고 저를 챙겨줬다. 한사람당 한 개씩 주는 바나나를 부대원들이 18개나 몰아줘서 배 터지게 먹었다. 고마웠다.”

-훈련소 측의 도움은 없었나

“간부들의 도움도 컸다. 훈련소 입소 첫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시간에 고민을 적었다. 평소 앓았던 위염 증상을 소개하고, 이로 인해 소화기능이 약해 육류, 해산물 등의 동물성 성분을 먹지 못한다고 알렸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상의 이유로 채식을 한다고 했을때 이해도가 높아서, 동물권·환경 보호 등의 이유는 언급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대장이 나를 호출했고, 나의 사연을 더 자세히 물었다. 그들은 ‘평소 무엇을 먹냐’ ‘많이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군대라는 조직에서 한 사람을 신경 쓰기 쉽지 않을 텐데, 챙겨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중대장은 ‘고마운 것이 아니다. 모든 훈련병이 안전하게 무사히 수료하도록 돕는 것이 나의 군인된 의무’라고 말했다. 면담 이후, 부대 소대장은 출퇴근길에 200㎖ 두유 한 팩와 바나나 하나를 장교휴게실 냉장고에 매일 넣어줬다. 매달 30만원 입금되는 나의 훈련비 카드를 건네며 결제를 부탁했고 그것으로 소대장이 대신 구매해줬다.”

-동료들과 지내는 데 어려움은

“처음에는 소화기관이 약해서 채식한다고 말했다. 그간의 사회 경험에서 느낀 점인데, 생명존중이나 동물보호 등 윤리적인 이유로 채식한다고 말하면 육식 생활하는 본인에게 죄책감을 유도한다며 불편해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동료 소대원들과 친해지기 위해 소대 대표 훈련병에 지원했다. 물품배급 등 크고 작은 심부름을 하고, 지나가는 동료들에게 밤잠은 잘 잤는지 묻거나 군복 소매 각을 잡아주기도 했다. 비건이라서 배고프다고 종종 하소연 했는데, 기억해준 동기들이 급식에 나오는 김이나 바나나를 챙겨주곤 했다. 덕분에 후반부로 갈수록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이규영씨 제공

-비건이어서 받은 질문들이 있는지

“식물은 불쌍하지 않냐고들 묻는다. 채식한다고 모든 생명을 살릴 수는 없다. 나도 비건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지만 걷다가 작은 개미를 밟을 수도 있고, 내가 썼던 화장품 등 화학약품이 바다로 흘러가 살생을 저지를 수도 있다. 다만 비건은 지구에 최소한의 해를 끼치면서 사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소고기 450g을 생산하려면 7000g의 곡식이 필요하다. 식물이 정말 불쌍하다면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비건식은 단백질 섭취가 부실하지 않냐는 지적도 받는다. 하지만 올림픽 9관왕을 달성한 미국 육상스타 칼루이스, 마블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토르 역을 맡은 크리스 햄스워스, 23회 우승을 차지한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세레나 윌리엄스도 채식을 한다. 채소, 과일, 통곡물을 통해서도 단백질의 재료인 필수 아미노산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코끼리와 황소도 풀만으로 자신의 거대한 체형을 유지하지 않는가. 다른 비건들은 어떻게 군 생활을 견디냐는 질문도 받았다. 먹을 것을 두고 나처럼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하거나 아니면 병역거부를 결심한 지인도 있다.

-식생활을 지켜온 지 얼마나 됐나

“식습관의 변화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집밥에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살코기, 햄 등 축산가공육은 거부하고 해산물, 유제품까지 먹는 패스코 식단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같은 생명체인 생선이나 유제품은 먹는 상황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해서 비건을 실천하기로 했다. 주로 인터넷으로 채식을 검색하면 나오는 콩고기 제품과 집에서 만든 나물 반찬, 채수로 끓인 된장국 등으로 해먹었다. 체계적 정보가 부족해서 시행착오도 있었다. 샐러드에 참깨 드레싱을 뿌려 먹었는데 알고 보니 드레싱에 우유, 달걀, 소고기 성분이 들어가 있었다. 이후엔 학교 급식도 안 먹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는 외출증 끊고 집밥을 먹고 돌아왔다. 종종 학교로 늦게 돌아와서 선생님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그 뒤 성인이 돼서는 동물구조단체에서 동물을 입양보내고, 비건 레스토랑에서 매니저로 활동했으며, 비건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 정보 등을 제공하는 SNS 채널을 운영 중이다.”

이규영씨 제공

-비건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고등학생 시절, 유기 및 학대동물 400마리를 돌보는 보호소인 충남 천안의 동물과의아름다운이야기에서 매주 봉사활동을 했다. 수백 개나 되는 견사를 몇 개월 동안 쓸고 닦는 돌봄활동을 하다가 방향을 돌려 동물 입양홍보에 힘쓰게 됐다. 난생 처음으로 보호소를 홍보하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고 전문 사진작가와 디자이너의 재능기부를 받아 함께 동물들의 입양홍보물을 만들었다. 페이지 구독자가 9만명까지 늘었고, 매달 한두 마리도 입양 보내기 힘들던 보호소에서 매달 25~30마리씩 새 가족을 만났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선생님들의 허락을 받아 수업시간에도 태블릿으로 동물 입양홍보물을 만들었고, 그 이력으로 대학 동물계열 학부에 수석입학했다. 또한 매주말마다 동물의 권리에 관한 콘퍼런스나 행사에 참여하면서 동물보호단체 활동가들을 만나게 됐다. 고기가 접시 위에 올라오기까지의 참혹한 과정을 조금씩 알게 됐고, 고기·치즈 같은 동물 성분 없이도 생크림 케이크·짜장면·피자 등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채식을 시작했다.”

-입대를 앞둔 비건들에게 전할 말은

“입대를 앞두고 너무 불안해서 인터넷 검색을 수차례 했지만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라면 훈련소 소대장 또는 중대장에게 직접 찾아가 건강상의 이유로 동물성을 먹지 못한다고 얘기해봐야 한다. 상황을 이해해준다면 김처럼 두고 먹을 수 있는 식품을 요청해보자. 혹은 같은 소대 훈련병들과 친해져서 배식 할 때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 나는 운이 좋았다. 동기들한테 도움도 많이 받고. 무엇보다 간부의 성격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는 게 현실이긴 하다.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뭐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제도화가 필요하다. 하루빨리 군대에서도 채식을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당장 훈련소 생활을 앞두고 있는 채식인들에게 내 경험이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한다.

이성훈 기자 tell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