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혼 동거 중 다툼이 일어나 함께 쓰던 이불과 카펫 등을 파손했더라도 명백한 ‘타인의 재물’이 아니라면 재물손괴 범죄로 볼 수 없다고 헌법재판소가 결정했다. 파손한 이가 동거 이전부터 구매해둔 물건이었던 점, 소유권 논의 없이 비교적 짧은 기간 함께 사용한 점 등을 고려하면 공동소유물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다.
헌재는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A씨가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라”고 9일 결정했다. A씨는 지난해 6월 자신의 집에서 사실혼 배우자 B씨와 다투다 이불, 카펫, 수건, 슬리퍼 등을 가위로 자르고 밥통을 집어던졌다. 검찰은 A씨의 행위가 재물손괴죄에 해당하긴 하지만 사안이 경미하다며 A씨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재판에 넘기지 않았다. 실질적인 유죄 인정에 A씨는 헌법소원을 냈다.
A씨는 “이불 등은 B씨와 동거 이전 구한 것”이라며 재물손괴죄가 애초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헌재도 “물건들이 두 사람의 공동소유로 변경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헌재는 “A씨가 사실혼 이전에 구입한 이불, 카페트 등은 그 이후 함께 사용했다 하더라도 사실혼 기간이 약 10개월 정도로 짧았던 점 등에 비춰 타인의 재물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다.
A씨와 B씨의 다툼 과정에서는 둘이 함께 구입한 장판도 표면이 긁혔다. 하지만 헌재는 이에 대해서도 재물손괴가 인정되기 어렵다고 봤다. 헌재는 “표면에 흠집이 난 것에 불과하고 교체나 수리를 요할 정도의 손상이 아니다. 장판으로서의 효용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