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타자에게 속할 수 있는 자유의 시간”

입력 2020-04-08 14:11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김인환 고려대 명예교수는 산문집 ‘타인의 자유’에서 “독서는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창조적 놀이”라고 말한다. 픽사베이

지난주 서효인 시인이 소개한 ‘편집가가 하는 일’을 나 역시 흥미롭게 읽었다. ‘편집가가 하는 일’은 출판을 의사소통 사업으로 규정한다. 이 책에 따르면 편집가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양방향, 즉 저자와 출판사라는 두 주체와 완전하고도 정확한 의사소통을 해내는 것이다. “침묵은 위험하고 자칫 오독되기 쉽다.” 생각해 보면 책은 소통의 매개일 뿐만 아니라 소통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저자는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 책을 쓰고 독자는 저자와 또 다른 독자, 즉 타인과 소통하고 궁극적으로는 타인에 비추어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저자와 출판사 사이에 얼마나 활발한, 또 격의 없는 대화가 이루어지는지는 의문이다. 작가와 출판사가 계약 문제에 관해 충분히 소통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적잖은 사건들이 그렇지 못한 현실을 짐작케 한다.

편집자와 작가가 격의 없이 대화해야 할 분야는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작품에 대한 것이다. 좋은 것은 왜 좋고 부족한 것은 왜 부족한지, 좋은 것은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 수 있고 부족한 것은 어떻게 하면 덜 부족할 수 있을지 주저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편집자가 작성하는 소개 문구와 줄거리 요약도 논의 대상에서 빠질 수 없다. 다른 하나는 계약에 대한 것이다. 통상 선인세라 부르는 계약금의 유무와 정도 및 계약 기간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외국어판 출간을 위한 저작권 관리나 영상, 공연 등 2차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관리하는 방식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작가와 출판사는 더 이상 궁금한 게 없을 때까지 논의하고 협의해야 한다. “침묵은 위험하고 자칫 오독되기 쉽다.”


의사소통 산업으로서의 출판에 대해 생각하다 자연스레 한 권의 책을 떠올렸다. 최근 출간된 김인환 평론가의 산문집 ‘타인의 자유’다. ‘타인의 자유’는 문학적 상상력과 인문학적 사상, 그리고 예술적 감각이 깨달음이라는 삶의 치료제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 지속된 오랜 ‘공부’의 결과물이다. 문득 이 책을 떠올린 까닭은, 문학평론가야말로 의사소통으로서의 읽기와 쓰기를 전면에 내세운 채 평생을 작가의 독자로서, 혹은 독자의 작가로서, 말하자면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숙제처럼 책 읽고 글 쓰고 술 마시며 세월을 다 보내고 나니 이제는 가고 싶은 길이 어느 쪽이었는지도 잊어버”린 채 쉰을 넘기고 어느덧 일흔이 넘어 “잘라놓은 그루터기처럼 마음이 말라가고” 있다는 노학자가 스스로를 묘사하는 목소리엔 조금의 과장도, 자조도 섞여 있지 않다. 그래서 더 신뢰 가는 그의 ‘자유론’은 무엇보다 타인의 자유론이다. 타인의 자유론은 타인이라는 다양성 안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중심의 자리를 거부하는 태도다. 중심을 차지하는 대신 옆을 공유하는 곁가지 존재론은 예술로서의 소통이 다다를 수 있는 미학과 윤리의 정점이 교차하는 장소가 아닐까. 나는 여기서 문학의 자세를 배운다.

곁가지 존재론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론으로 내가 특별히 배워둔 것은 “측면의 독서”다. 측면의 독서는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보다 여러 책을 한 번 읽는 것이 더 깊은 의미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믿는 독서법이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바닥까지 내려가 극단을 경험하는 것보다 여러 책 사이를 유영하며 예기치 않은 관계 안에서 생겨나는 다중의 시선으로 한 권의 책을 바라볼 때, 의미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곳에서 출현하고 이때의 다양성은 모두가 도달하고 싶어 하는 깊이에 다름 아니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 세워진 신념의 장벽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기에 최적화된 시대, 독서는 타자에게 속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자유의 시간이다. 그루터기처럼 말라가고 있다고 말한 선생은 타자의 세계에 속해 있는 자아를 “타인들 틈새에 맺혔다 사라”지는 물방울 같다고 말한다. 말라가고 있다는 말은 지나친 겸손이 아니었나 싶다. 타인들 속에서 그는 한 번도 마른 적 없는 물방울이었을 것 같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