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다큐소설] 청계천 빈민의 성자(15): 일본 결핵

입력 2020-04-08 09:57 수정 2020-04-08 10:00
註: 예수와 같은 헌신적 삶을 살고자 1970년대 서울 청계천 빈민들과 함께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노 선생)와 빈민운동가 제정구 등이 겪은 ‘가난의 시대’. 그들의 삶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인류 보편적 가치 그리고 한국 교회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큐 소설이다.

노 선생(오른쪽)이 1973년 7월 찍은 청계천 변 주민과 찍은 사진이다. 당시 청년이었던 이 주민은 폐결핵 투병 중이었다. 노 선생은 비롯한 한국 교회가 이들을 병치료를 도왔다. ⓒ 노무라 모토유키

“나는 지금까지 행복한 삶을 살았다. 돌이켜 보면 감사할 일뿐이었다. 예수를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니 더 행복했었다. 이제 나는 하나님 품으로 간다. 너희들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가길 바란다.”

1936년 여름 내 나이 여섯 살 때 일이다. 나의 아버지 노무라 지이치는 이런 유언을 남기고 영면에 드셨다. 어린 내가 아버지의 이런 유언을 알아들었을 리 없다. 이모가 훗날 아버지의 유언을 알려 주었다. 다만 그날 임종 장면은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는 후두결핵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결핵은 중세 흑사병처럼 인류를 위협했고, 아버지도 그 병이 발병해 젊은 어머니와 어린 나를 남겨두고 하나님 품 안으로 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학자였다. 공장을 경영하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훌륭한 학자가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미션스쿨인 도시샤대학 행정법학 교수가 됐다. 도시샤대학은 1875년 목회자이며 교육자였던 니지마 조(1843~1890)가 설립한 사립대학으로 한국의 연세대학교와 같이 기독 정신으로 출발했다.

내가 너무 어렸으므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만두 심부름을 다녀온 나에게 심한 꾸지람을 했던 단편적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학자여서 그랬던지 매우 꼼꼼하셨고 항상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셨다.

왜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지, 왜 가난한 이웃을 돌봐야 하는지를 당신의 삶 속에서 가르쳐 주셨다. 그 가르침은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로 내려왔으며, 내가 성장해서는 어머니로부터 내게 이어졌다.

돌이켜 보건대, 어려서 교회에 출석하며 부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내 일평생을 좌우했다고 본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일본에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손가락질받는 일이었다. 그 숫자도 소수에 지나지 않아 늘 ‘이상한 사람’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본에서 크리스천으로 살기란 가혹한 일이다.

교회서 충실한 직분을 수행하던 아버지는 동양의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니었다.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어머니와 교회에서 만나 결혼한 것만으로도 신앙 안에서 깨어있던 지식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가르쳐 준 일은 없다. 다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기독교는 네 이웃을 위한 신앙이다’라는 진리를 당신의 교회 활동과 당신의 실천을 통해 알게 해주셨다. <계속>

작가 전정희
저서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한국의 성읍교회’ ‘아름다운 교회길’(이상 홍성사), ‘아름다운 전원교회’(크리스토), ‘TV에 반하다’(그린비) 등이 있다. 공저로 ‘민족주의자의 죽음’(학민사),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청한)가 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