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라운드는 기대도 안 했었죠. 그냥 프로에 가는 것만으로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흥국생명 레프트 박현주(19)는 올 시즌 프로배구 V-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1순위에 지명됐다. 날카로운 공격력을 가졌지만, 신장이 작았던 데다(176㎝) 용병 선수들이 많이 뛰는 라이트 포지션에 더 어울리는 왼손잡이란 점에서 1라운드 선수들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박현주는 6일 국민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당시까지를 ‘자신감이 없었던 시기’로 떠올렸다. 고교 3학년을 앞두고 중앙여고로 전학해 새로운 환경에서 고참으로서 성적에 대한 책임감을 짊어져야 했다. 2년 터울의 쌍둥이 동생인 박예현(중앙여고)과 박현빈(속초고)이 모두 배구선수 생활을 하고 있어, 맏이로서 프로 선수로의 길을 열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컸다고 한다. 박현주가 프로 지명 자체로 기뻐했던 이유다.
그랬던 박현주는 올 시즌 신인왕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올 시즌 25경기에 출장해 총 103득점(성공률 34.45%)을 올렸고, 서브에이스 27개(세트당 0.329개)를 기록하며 자신의 장점도 뽐냈다. 시즌 초반엔 원포인트 서버로 활용돼 경기에 나설 기회가 적었지만, 에이스 이재영(24)의 부상으로 나선 경기들마다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신인 중 유일하게 100득점을 넘겼다.
되찾은 자신감이 주효했다. 프로 무대가 무섭게만 느껴졌던 박현주에게 고참 선수들은 ‘잘 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감 있게 하라’고 주문했다. 박현주는 특히 고참 리베로 김해란(36)의 애정어린 조언을 떠올렸다. “서브가 안 먹힐 때 ‘힘을 빼고 해보라’고, 분위기가 가라앉을 땐 ‘정신 차려’라고 먼저 한 마디씩 건네주셨는데 바로 경기가 잘 풀려 감사했어요. (조언대로)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고 해보니까 오히려 더 잘 적응할 수 있었죠.”
흥국생명에 함께 지명된 동기 김다은(19)과 이유안(20)의 존재도 힘이 됐다. 학창시절 한 번씩 같은 학교를 거쳤던 세 선수는 매일같이 개별 훈련에 함께 나가 리시브·블로킹 등을 함께 연습했다. 경기가 잘 안 풀릴 땐 속상한 점들을 서로 이야기했던 게 심리적 안정에도 도움이 됐다고 한다.
박현주가 9일 시상식에서 신인왕을 수상하려면 또 다른 ‘동기’ 이다현(19·현대건설)을 넘어야 한다. 둘은 중학교 때 참가한 꿈나무 동계훈련에서 알게 된 절친이다. 박현주가 중앙여고로 전학 갔을 때에도 이다현이 적응에 많은 도움을 줬다. 고3땐 의기투합해 엔트리에 3학년 선수가 3명이나 더 많았던 일신여상을 누르고 서울시 평가전 1위를 차지한 뒤 전국체전에 나가 동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박현주는 “다현이랑 ‘우리가 이끌자’고 다짐했는데 결국 승리해 부둥켜안고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상기했다.
시즌 초반부터 빠른 적응력을 보이며 올 시즌 블로킹 24개 포함 총 71득점을 올린 이다현의 존재는 박현주가 ‘나도 잘 하고 싶다’고 생각한 동력이 됐다. 후반기엔 출장 기회가 적었던 이다현보다 박현주가 더 좋은 성적을 냈다. 박현주도 이제는 신인왕에 욕심이 난다고 한다. 수상자가 될 경우 2라운드 지명 선수로선 여자부 최초다. 그는 “50대 50일 것 같지만 처음보다 욕심이 난다”며 “(상금 200만원을 받는다면) 어린 시절 키워주신 할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싶다”며 웃었다.
맏딸이 조금이라도 부담을 느낄까 신인왕 수상 여부에 대해 전혀 내색하지 않고, 성적이 좋지 않을 때도 묵묵히 응원만 했던 아버지는 최근 딸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가 시상식 때 입을 회색 브라운 빛깔 정장을 사줬다고 한다. 박현주는 “정장을 처음 입어봤는데 신입사원이 된 느낌이었다”며 “아빠가 말은 안 하셔도 신인왕 받길 기도하고 계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신인왕 여부완 상관없이, 박현주는 더 발전할 2년차를 꿈꾸고 있다. 그는 2월 16일 3대 2로 승리한 한국도로공사전을 떠올렸다. 이재영이 복귀하기 직전이었던 이날 경기에서 박현주는 서브 득점 2개를 포함해 개인 한 경기 최다 타이인 14점을 올려 팀의 7연패를 끊어냈다.
“긴 연패가 처음이라 모두 포인트를 결정짓지 못한 제 탓인 것만 같아 속상했는데, 승리하고는 기뻐서 펑펑 울었어요. 2년차엔 결정력·리시브·서브를 모두 보완해 좀 더 책임감 있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이동환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