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노골적인 홍보 속에 말라리아약 ‘하이드록시클로로퀸(클로로퀸)’이 급작스럽게 코로나19 치료제로 떠올랐다. 보건 전문가들이 아닌 트럼프의 측근들이 이 과정을 주도하고 밀어붙인 것으로 드러났다. 소수 측근들에 기대 국정이 운영되는 트럼프 행정부의 난맥상이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서 재연된 셈이다.
미국 온라인매체 악시오스는 5일(현지시간)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 관계자 4명을 인용해 피터 나바로 무역제조업정책국장과 앤서니 파우치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이 전날 TF회의에서 충돌했다고 보도했다. 두 사람의 언쟁은 ‘백악관이 얼마나 강하게 말라리아약을 코로나19 치료제로 선전해야 하는가’를 두고 불거졌다.
트럼프의 최측근으로 그의 경제고문 역할을 맡고 있는 나바로 국장은 회의 끝 무렵 서류 한 무더기를 상황실 테이블에 꺼내보이며 “클로로퀸은 해외에서 명백히 치료 효과가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미국 내 감염병 분야 최고 권위자인 파우치 소장은 반발했다. 클로로퀸의 효험이 아직 일회적 수준에 그쳐 치료제로 홍보되기에 부족하다는 취지였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보건 전문가들 역시 효과 입증을 위해서는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거들었다.
분개한 나바로 국장은 서류들을 가리키며 “이게 과학이다”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면서 “일찌감치 중국 여행자 입국금지가 효과가 없다고 반대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다”고 비난했다. 파우치 소장의 전문가로서의 권위를 폄훼한 것이다. TF관계자들은 “여지껏 회의에서 이토록 강한 충돌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보건 전문가들의 반발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이날도 클로로퀸 홍보를 이어갔다. 그는 백악관 코로나19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클로로퀸을 비축했다”며 “위대한 말라리아약이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효과가 좋은 강력한 약”이라고 강조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헨리포드병원에 입원한 환자 3000명을 대상으로 클로로퀸을 실제 투약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WP)는 같은 날 트럼프의 클로로퀸 홍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인물로 루돌프 줄리아니를 지목했다.
줄리아니는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 위기로 몰아붙인 ‘우크라이나 스캔들’의 몸통으로 불리는 인물로 탄핵 정국 내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로서 어떠한 공식 직책 없이 미국의 주요 외교 정책에 개입해 ‘미 외교계 비선실세’라는 오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WP는 “줄리아니가 트럼프 대통령과 3~4번 가량 직접 통화해 클로로퀸이 코로나19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얘기했다”며 트럼프가 그간 이 약을 코로나 사태를 끝낼 “게임 체인저”로 소개한 배경에는 줄리아니가 있다고 보도했다. 줄리아니는 “클로로퀸 사용을 주의해야 한다”는 파우치 소장의 당부에 대해서도 “빌어먹을, 생명을 구하고 싶다면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WP는 “올해 초 트럼프의 무급 개인변호사로 탄핵 폭풍의 중심에 섰던 줄리아니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트럼프의 개인 과학 고문’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됐다”고 비꼬았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