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위기는 기본으로 돌아가게 한다 : 고난(suffering)과 진정 성(Integrity) 편

입력 2020-04-06 10:51 수정 2020-04-06 17:17

박계문 목사
전 이랜드 사목
캐나다 트리니티 웨스턴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ty) 박사(D.min.) 과정

멈춤의 진정성에 약간의 고통 따라
위기상황서 돌아가야 할 곳은 진정성 회복
고난주간 맞아 진정한 영혼의 스토리 여행를

본문 : 로마서 1장 7절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인간에게는 두 가지 미궁(ironical)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거의 느끼지 않고 산다는 미궁(ironical)입니다. 그러면서도 불구하고 인간의 죽음의 망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시인이나, 철학가나 예술 하는 사람들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가 평범한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은 이 이유입니다.

또 하나는, 이해 할 수 없는 미궁(ironical)은 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 편리함(convenience)을 통해서 편안함(comfort)은 제공합니다. 각종 최첨단의 혜택으로 인해서 편안(comfort)하면 할수록 평안함(peace)을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더욱 불안과 공포는 가중되고 되고 있습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실존(實存)입니다. 요즘 흔히 접하는 언어 중 공포(phobia)라는 용어입니다. 각종 파생되는 정신 의학적인 용어로 함께 합성되어 사용합니다.

정리하자면, 인간에게 죽음이 가장 두려우면서 인간은 이를 망각하고 사는 미궁(ironical)과 반대로 문명이 주는 편안함(comfort)에서 평안(peace)과 비례해야 하는데, 더욱 불안과 공포에 중독되어 있다는 미궁(ironical) 입니다.

산업 혁명 이후, 19세기 중반에 두 실존 철학이 등장합니다. 내면적인 실존과 현상적인 실존입니다. 산업 혁명이 인간에게 획기적으로, 풍요로움과 편리함을 제공하였지만 반대로 그 사회에 부작용(side-effect)과 급격한 변화의 불확실성 앞에 불안과 공포를 철학적, 심리학적으로, 때로는 문학으로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철학자인 덴마크의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책이 제목이 불안의 개념, 두려움과 떨림, 죽음이 이르는 병 등 많은 인간의 불확실 성에 대한 것을 다룬 책들이 등장합니다. 동시에 대표적으로 현상적인 실존을 다룬 칼 마르크스도 있습니다. 이는 산업의 변화로부터 생기는 인간의 공동화 현상인 “소외”입니다. 인간의 값을 자본으로 결정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한 불평등, 불 공정,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약자들의 소외를 다룹니다.

본문 로마서 1장 7절에, “은혜와 평강”입니다. 바울 서신의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 빠지지 않는 단어가 바로, “은혜와 평강”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순서도 동일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무엇이 우선 순위인가?

이번 주는 특별히 종료 주일을 지나, 고난 주간을 맞이 합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는 무엇보다 전 세계 교회는 초유의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교회들은 많은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정부와의 갈등, 예배에 대한 간절함, 이 시점에 또한 예수님의 나귀 타신 겸손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순간들의 맥락을 한번 묵상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억울함 자체였지만, 빌라도의 법정에서 한마디의 억울함을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함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한국 교회에 함께 있었으면 합니다.

디모데 후서 3:5절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 하는 자니……” 모양과 능력을 잘 구분하고 영적으로 돌아 서야 합니다.

이 능력(뒤나미스-power)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성령의 활동하심 입니다. 예배든 삶이든, 성령이 활동 할 수 있는 영역이 없습니다. 과거의 중세에 있었던 제의적(liturgical)인 것들을 연구하고 도입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예배에 들어 갈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세련되고 청소 잘 된 곳에 주인이 없는 예배는 사탄이 더 우 굴 거릴 뿐입니다.

잘 보세요. 성경은 사도 바울을 통한 기본 인생의 문제 풀이에 정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은혜로다” 입니다. 그리하면 평강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이 은혜(Karis-Grace)라는 헬라 어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기쁨(kara), 감사(Eucharisteo), 은사(Charisma), 성찬(Eucharist)입니다. 신앙과 삶의 온갖 보물 패키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파생된 요인이 인간의 내면과 삶에 평안(peace)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현대 크리스천들은 미디어와 각 종 오락 같은 너무 잡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슴에 신앙 따위는 집에 엮어 매달아 놓아 쳐다보기만 하는 굴비 일뿐, 신앙이 아닌, 신념을 잡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신앙은 평안을 제공하지만, 신념에는 늘 불안을 느낍니다.

또한 각종 미혹에 현혹되어 인간의 심미적인 눈만 살아서 있습니다. 많은 활동과, 정보를 통해서 늘 비교의식에 찌들어 삽니다. 비교만 하지 결정을 못하는 결정 결핍증에 걸려 있습니다.

정지, 멈춤! 이 공간에는 보이지 않는 진정 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잠시만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 말고 계셔보세요. 30분만요. 내면의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어떤 때는 거짓 없는 눈물이 마구 솟아 질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눈물 씻고 일어나지 말고 30분만 더 하나님의 말씀을 드셔 보세요.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 것입니다. 그리고 오묘함이 느껴 질것입니다.

어쩌면 멈춤의 진정 성(integrity)에서는 약간의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이 고통의 시간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물을 마시는 시간입니다. 소는 물을 먹으면, 우유를 생산합니다. 반면, 뱀은 물을 먹으면, 독을 생산합니다. 멈추고 내면의 은혜를 찾는 자는 유익한 마음으로 타인에게도 이로움을 전달 할 것입니다. 반면 현혹되어 유혹에 빠진 사람은 타인에게 독을 뿜고 해로움을 주고 다닌 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열매를 보면 그를 안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5-20)

C.S 루이스는 그의 책,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에서 말하길, “고통은 정신을 자극하는 촉매제이며, 생각이 게으름은 큰 범죄이다” 라고 했습니다.

특히 한 동안 자기 개발서만 서점가에 최고 판매를 기록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정신 없이 자신을 개발하여 잠시 연봉을 높일 것인가? 혹은 진급할 것인가? 입니다. 그 혈안에 늘 불안과 초조함에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1장 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성경은 공교롭게도 걱정과 염려(anxiety, fear) 에 대한 단어가 366번(완벽하게 윤년 포함)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쾌락입니다.

디모데 후서 3장4절에,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문화 유형 중에 욜로(You Only Live Once, YOLO)라는 신생 문화가 생겼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즐기고 보자 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고통, 불안, 두려움, 공포 등 부정적인 요소에서 도피 하려는 극단적인 쾌락적 삶의 패턴이라 여겨집니다.

영화 중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주인공 로빈 월리엄스는 카르페 데엠(Carpe Diem)이라는 라틴어 명 대사가 있습니다. 지금을 즐겨라! 라는 의미입니다. 쾌락 주의(에피쿠르스 학파)에서 유래된 언어입니다. 일말의 일상으로부터의 도피 입니다. 영어에서도 일시적으로 일을 끝내고, 뒤는 생각하지 않고, 마무리 할 때 “wrap it up” 합니다. 일은 그대로 있지만 포장하고 보는 것입니다.

불안, 두려움, 공포 등등에서 항상 소외감을 느낍니다. 때로는 페로소나(이중성의 가면)적인 행위로 자신을 포장하기도 합니다.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처세술이며, 불안 가면일 뿐입니다.

잠언 27장 19절에,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예를 들어, 왜 맥아더 장군은 항상 투구를 쓰지 않고 멋진 정복 모자를 쓰고 전쟁에 임할까? 그의 정복에 모자는 전쟁터의 군인들에게 용기와 여유를 보여 주는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어쩌면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게 위한 방법이고 위장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위장된 모자는 리더십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노 장군의 모습에서 축적된 무한 긍정과 신뢰의 진정 성이 병사들에게 비춰진 것입니다.

요즘 글로벌 대 유형(pandemic) 현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음의 슬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곧 그 치사 율이 1차, 2차 대전의 죽음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슬픈 전망이 있습니다.

스탈린이 말하길, “ 한 사람이 죽은 것은 슬픔이다. 그러나 수만 명이 죽은 것은 통계 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하루에, 수천 수 만 명의 죽음을 접하면서 지금 통계로만 보이십니까?


크리스천들이 취해야 할 진정 성은 어떤 것입니까?

로마서 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서 필자는 두 가지 걱정이 됩니다. 하나는 경제입니다. 또 하나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이후, 진정될 경우, 전세계의 손익 계산에 의한 결산입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파이낸셜 타임즈에 기고를 했습니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서 결론은 연대를 강조하지만, 내심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흘러 갈 것인가? 또 하나의 위기에 대한 그의 고민 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연대 의식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연대하여도 진정 성이 없이 서로가 경제적 이익으로 연대만 한다면 아무런 해결 책이 되지 않고 미봉책이 될 것입니다. 고통의 진정 성을 나누지 못하는, 단지 역사 학자의 호소 일뿐입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지금 위기 상황에서 다시 돌아 가야 하는 곳은 어디인가?

진정 성의 회복입니다. 슬픔을 가루지 못하는 분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기도로 후원해야 합니다. 이 아픔을 나누고 있는 대한민국과 전 세계의 의료진들에게 진정 어린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지금 뉴욕의 맨하탄을 중심으로 아침 7시가 되면 건물 밖으로, 수고 하는 분들을 위해서 격려의 박수를 치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단지 진정한 마음으로 함께 격려하는 것입니다. 천박한 정치 선동가들의 헤게모니 싸움 판에 동조하는 언론들도 좀 자제했으면 합니다. 진정 성을 찾아서 후미 지고 구석 진 곳에 미담들을 찾아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신저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 하여, 진정한 영혼의 스토리 여행(journey)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한번 바라보고, 주변도 바라보고 할 수 있는 영혼의 공간(room) 입니다. 이것이 안이하고 편리(convenience)한 삶으로부터, 편안(comfort)만 찾았던 삶에서 이제는 진정한 평안(peace)을 찾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