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들은 은혜를 베풀면 갚을 줄 몰라요. 우리 주인님은 그들에게 너무 잘해준단 말이에요. 가차 없이 해야 한다고 봐요.”
공장 관리자가 그러한 말을 하면 아버지는 그들을 나무라셨다.
“고향을 떠나 이 멀리까지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박정하게 굴면 안 된다. 은혜를 받으면 누구나 깊을 마음을 갖고, 은혜를 베푼 사람은 베푼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조선 사람에 대한 인상은 물동이를 지고 가는 모습이었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땋은 여자가 물지게를 지고, 지게 양 끝에 양동이를 매달아 한가득 물을 나르는 기이한 장면은 지금도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현재도 조총련 여성의 한복이 그 시절과 같다고 알고 있다.
훗날 서울 청계천에 왔을 때 그곳이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교토 이시진의 환경보다도 못한 청계천 빈민의 실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시장과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봉제업이 급속도로 발전되고 있었다.
그 발전 기반은 부모를 따라 상경한 어린이와 무작정 상경한 청소년의 노동력이었다. 그들은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복층 구조의 작업장에서 미싱을 돌렸으며 하꼬방 같은 데로 돌아가 잠을 잤다.
이시진의 조선인은 어른이건 아이건 멸시의 대상이었다. 아이들끼리는 조센진이라고 놀렸으며 어른들도 불가촉천민 대하듯 했다.
이 무렵 나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이시진에 있는 슈락구교회에 다녔는데, 그 교회에 가면 재일 조선인 등을 포함해 가난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들은 늘 굶주린 표정이었으며, 뭔가 불안한 눈동자였다.
아마도 우리 부모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우리 부모 또한 예수 시대의 가난한 민중과 같았던 일본의 조선인들을 멸시했을 것이다. 나 또한 부모에게 영향을 받아 이방인 취급했을 가능성이 크다.<계속>
작가 전정희
저서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한국의 성읍교회’ ‘아름다운 교회길’(이상 홍성사), ‘아름다운 전원교회’(크리스토), ‘TV에 반하다’(그린비) 등이 있다. 공저로 ‘민족주의자의 죽음’(학민사),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청한)가 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