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다큐소설] 청계천 빈민의 성자(14):일본인의 멸시

입력 2020-04-06 10:45
註: 예수와 같은 헌신적 삶을 살고자 1970년대 서울 청계천 빈민들과 함께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와 빈민운동가 제정구 등이 겪은 ‘가난의 시대’. 그들의 삶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인류 보편적 가치 그리고 한국 교회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큐 소설이다.

서울 마장동에 위치한 청계천박물관을 배경으로 '판자집체험관' 모습이다. '민속마을 집'처럼 보이나 더할 수 없이 열악한 환경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은혜를 베풀면 갚을 줄 몰라요. 우리 주인님은 그들에게 너무 잘해준단 말이에요. 가차 없이 해야 한다고 봐요.”
공장 관리자가 그러한 말을 하면 아버지는 그들을 나무라셨다.

“고향을 떠나 이 멀리까지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박정하게 굴면 안 된다. 은혜를 받으면 누구나 깊을 마음을 갖고, 은혜를 베푼 사람은 베푼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조선 사람에 대한 인상은 물동이를 지고 가는 모습이었다.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땋은 여자가 물지게를 지고, 지게 양 끝에 양동이를 매달아 한가득 물을 나르는 기이한 장면은 지금도 머릿속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현재도 조총련 여성의 한복이 그 시절과 같다고 알고 있다.

훗날 서울 청계천에 왔을 때 그곳이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교토 이시진의 환경보다도 못한 청계천 빈민의 실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광장시장과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봉제업이 급속도로 발전되고 있었다.

그 발전 기반은 부모를 따라 상경한 어린이와 무작정 상경한 청소년의 노동력이었다. 그들은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복층 구조의 작업장에서 미싱을 돌렸으며 하꼬방 같은 데로 돌아가 잠을 잤다.

이시진의 조선인은 어른이건 아이건 멸시의 대상이었다. 아이들끼리는 조센진이라고 놀렸으며 어른들도 불가촉천민 대하듯 했다.

이 무렵 나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이시진에 있는 슈락구교회에 다녔는데, 그 교회에 가면 재일 조선인 등을 포함해 가난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들은 늘 굶주린 표정이었으며, 뭔가 불안한 눈동자였다.

아마도 우리 부모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우리 부모 또한 예수 시대의 가난한 민중과 같았던 일본의 조선인들을 멸시했을 것이다. 나 또한 부모에게 영향을 받아 이방인 취급했을 가능성이 크다.<계속>

작가 전정희
저서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한국의 성읍교회’ ‘아름다운 교회길’(이상 홍성사), ‘아름다운 전원교회’(크리스토), ‘TV에 반하다’(그린비) 등이 있다. 공저로 ‘민족주의자의 죽음’(학민사),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청한)가 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