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의술을 펼친 조선인 한의사’
‘구한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성공한 사업가’
‘안중근 의거를 도운 독립운동가 유동하의 아버지’
‘안중근 의거를 도운 독립운동가 김성백의 사돈’
이 모든 사람은 동일인물이었다. 지금부터 새로이 발견하고 찾아낸 이 인물을 세상에 알린다.
일제강점기 러시아에서 능숙한 사업수완을 발휘한 조선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유경집. 또 다른 이름 류초시, 류승렬. 유경집은 한의사가 되었고, 고향 원산을 떠나 러시아 국경지대에서 살다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한방 병원을 설립해 부호가 됐다. 그는 평소 약재를 하얼빈에서 자주 가져왔고,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고려인)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왔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고, 사업수완이 좋아 지역 한인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00년대 초반, 유경집은 러시아 장교들과 돈독한 인맥을 형성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 지역의 고려인 부호들과도 가까웠다. 이 중 독립운동가 최재형(최 페치카)와 특히 가까웠는데, 최재형이 대동공보사(신문사), 동의회(의병조직)를 조직할 때 비밀리에 힘을 보탠 것으로 보인다. 최재형은 안중근을 동의회 조직에 가입시킨 뒤 함께 의병 활동 및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암살 의거를 후방에서 지원한, 초기 상해임시정부 재무부장에 임명된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어느 날 안중근이 유경집을 찾아와 이등박문 암살 의거에 대해 논의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1909년 10월 러시아령 코트지로의 유경집 자택에서 아들 유동하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김성화 탁공규와 더불어 구국혁신을 맹세하는 ‘7인 동맹’을 조직했다.
안중근이 거사를 모의하고 이동하는 과정 중 기차 철도 환승 시간에 역 가까이에서 한약방을 하고 있던 ‘원래부터 잘 알던 유경집’의 집에 들러 그의 장남(유동하)을 통역으로 부탁했다는 것이 안중근과 유동하의 일관된 일본 심문조서 진술 내용이다. 이 시기 유경집은 한의사로서 명성이 있었고 아들 유동하를 하얼빈에 보내 약재를 구하도록 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유동하와 안중근 등이 김성백의 집에 3일간 머물렀다는 것, 안중근이 쓴 러시아어 편지를 유동하가 써주었다는 것 역시 공통된 진술이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사건으로 안중근은 사형, 유동하는 1년 6개월간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유동하는 하얼빈 의거가 있던 그 날 하얼빈 역사 안에서 안중근과 함께 ‘코레아우라’를 외친 대한의 청년이었다. 그때 그이 나이 18세였다. 거사를 도운 김성백은 유경집의 사돈이다.
상식적으로, 이토록 큰 거사를 보통 사이가 아니고서야 발설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안중근과 유경집의 친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오랜 시간 전부터 동지로서 마음을 나눈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18세 유동하의 안중근 의거 참가는 기실, 유동하의 결정 이전에 유경집의 결정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계획하고 이동 중에 포그라니치나야에 내린 것도, 역 근방에서 가까운 유경집의 집을 찾은 것도, 의거 전 2∼3일을 김성백의 집에서 유숙하며 의거 준비를 한 것도, 그 김성백의 집으로 안내한 유동하와 유경집의 사돈(사위 집안)인 김성백의 집안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모든 결정을 18세의 어린 유동하 단독으로 했다거나, 혹은 러시아 동아시아 지역에 금방 도착해서 길 안내와 통역을 부탁해야 했던 안중근 단독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거 뒤에는 독립운동단체 국민회 원동위원부의 협력과 유경집이라는 한의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등박문이 안중근에게 암살된 후 유경집 집안은 피난길에 올랐다. 계속해서 이사하며 도망 다녀야 했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는 기억하지만, 그로 인한 남은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보지 못했다.
“…여순구 동하 편지 보오니 아력으로 팔월 육일로 해옥 방송된다 하외다 형께서 만일 미주 가시옵거든 정형을 말하와 회기하여 주시옵소서.…정근씨네 댁이 대단하외다…” (1911년 7월 24일 류경집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1년 9월 7일 미주국민회의 자료집 18권 508쪽 내용이다. ‘1911년 7월에 씌여진 유경집으로부터의 편지 4개가 있다. 대체로 안중근의 식솔(안중근 동생 ‘정근네 댁’)들을 이강에게 안전하게 보냈고 그들이 잘 정착했다는 것, 그리고 인용문과 같이 아들 유동하가 뤼순 감옥에서 1911년 8월 6일 출옥한다는 것을 안창호에게 전하고, 안창호가 미국에 가거든 정형(정재관)을 통해 회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얼빈 한인 사회는 1911년 8월 22일 안중근 의거로 수용됐던 조도선과 유동하의 석방을 축하하는 환영회를 열었고, 8월 29일에는 강제병합일 망국 1주년 기념식을 개최 한인의 애국의식을 고취했다. 즉 1910년 한일강제합방(경술국치)일을 되새기며 우리의 수모와 현 실태를 잊지 않는 정신무장의 날을 가진 것이다.
1911년 이강, 안창호와의 편지 교환 맥락을 통해 사형당한 안중근의 가족들의 사후 지원에 유경집이 상당히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도 추론할 수 있다. 유경집 본인과 가족이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로 대표된 민족운동에 관여했고, 안중근 가족을 보살폈으며, 그로 인해 핍박과 이사를 거듭했다. 모험과 성공 이야기 이면에는 민족주의적 저항과 수난의 서사가 가로 놓여있었다. 그의 사돈 김성백은 안중근에게 거사 중 자신의 집을 제공해준 사실로 인해, 당시 일본과의 외교 문제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던 러시아 제국에 의해 동항 철도에서의 지위, 돈, 명예, 재러 한인 원호로서 누린 여러 가지 혜택을 모두 빼앗기고, 하얼빈에서 강제 추방됐다.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에 의해 10월 혁명이라 불리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유경집의 인생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쳤다. 한의학 병원을 개업하여 부를 축적했던 그는 ‘부르주아’, 즉 인민의 적이라는 무서운 딱지가 붙어 프롤레타리아(노동자)들에게 잡히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사뭇 이해가 안 될지 모르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부르주아는 정경유착, 부정부패, 탐관오리의 대명사와 흡사했다. 즉 부자여서가 아니라 당시 부자는 대다수 부패하고 권위적이었으며, 노동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유경집은 선의의 피해자이지만, 그걸 설명할 기회도 없이 자신이 일궈놓은 모든 부와 건물, 부동산을 전부 내버려 둔 채 폴란드계 러시아인 아내를 데리고 황급히 폴란드 국경을 건넜다. 이렇게 최초의 폴란드 거주 한국인이 탄생했다. 한의학 병원을 개업해 부를 축적했던 그는, 한순간에 무일푼 거지가 되었다. 그에게 남은 건 사랑하는 아내, 한의학 기술, 친근하고 외향적인 성격뿐이었다.
폴란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유경집은 다시 한번 사업수완을 발휘해 바르샤바의 중심 거리라 할 ‘노비 시비아트’(Nowy wiat·신세계)에서 큰 저택을 짓고 폴란드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한방 병원을 이룩해 다시금 부호가 되었다. 이때 그는 이름을 여러 가지로 바꿔가며, 전혀 새로운 인물로 살았고, 당시 폴란드, 독일 등 극소수의 한인 유학생들에게 정착금, 장학금, 생활비 등을 지급하며 그들이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국위 선양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이것이 서로 다른 이름을 사용한 한 애국자의 퍼즐을 맞춰 찾아낸 내용이다. 어딘가에는 사업가로만, 어딘가에는 한의사로만, 어딘가에는 민족운동가의 조각으로 나와 있던 한 인물. 서로 다른 직업에서 다른 이름을 사용했던 인물이었다. 유럽을 여행한 조선인 지식인 유학생들이 먼 타국에서 부자로 성공한 재류 동포의 초청을 받아 잘 대접 받았다는 이야기가 동아일보 기사에 남아있다. 유학생들을 정거장에 마중 나와 자기 집으로 데려가 극진히 대접한 이 ‘재류 동포 폴란드 의사 모씨’, 이름도 성도 없는 그는 바로 한의사 유경집이었다. 그의 말년은 조선에서 건너온 유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일이었다. 유경집은 고향을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결국 1936년에 고향인 원산으로 돌아가 1938년에 그곳에서 별세했다.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애국자였으며, 한의사였다.
정상규 작가는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통해 숨겨진 위인을 발굴해왔다. 현재 ‘국가유공자 지원 시민단체 포윅스’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독립운동 맞습니다’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