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디지털 성착취 사건, 이제는 화이트 컬러가 더 위험하다

입력 2020-04-03 12:36 수정 2020-04-04 20:47

김혜진 글로벌디지털성범죄연구소 대표

아동 디지털성범죄 진화
이제는 인식전환 필요한 때
대응 첫 걸음, 컨트롤타워 구축해야

최근 잔혹한 수법으로 아동의 성을 착취한 ‘N번방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이 공론화되고 있다.

하지만 과거 성범죄 유형과는 전혀 다른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모든 대응 방식을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는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 N번방 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정부 지원책으로 영상 삭제 및 새 주민등록번호 부여, 가해자 처벌에 대한 개정안 발의 등이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지원 시점의 적절성과 실효성 측면에서 이같은 땜질식 처방으로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전문가의 다수 견해이다.

이전까지 잔인한 아동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기초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어린 시절부터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다수였다.

하지만 오늘날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디지털 성범죄는 20~30대 젊은 남성들이 대다수이며 검거된 ‘N번방 사건’의 주범인 조주빈(25)은 학창시절 우등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아동 성범죄가 이전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유형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각종 첨단 기술이 동원되고 고등 교육을 받은 젊은 층들이 가해자가 되면서 현재의 아동 성범죄는 과거와는 본질적으로 달라졌으며 이것은 기존의 아동 성범죄 대응 체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에 지나치게 관대했던 우리 사회의 안이한 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N번방 사건의 가해자들은 힘없고 다루기 쉬운 취약한 대상을 선정해 금전적 이득을 미끼로 유인한 뒤 ‘성적 그루밍’(성적 착취를 목적으로 정신적으로 길들이는 행위)을 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외 선진국에서는 성적 그루밍 단계부터 처벌 규정이 상세히 마련되어 있는 등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사법 체계가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현행법에는 성적 그루밍을 처벌할 수 있는 세분화된 규정이 없다.

심지어 성범죄 의도를 가진 사람이 사이버 공간에서 행하는 회유와 협박, 스토킹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조차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는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신고를 하더라도 수사 기관의 이해가 부족해 적절한 대응이 이뤄지지 못해 2차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반면, 디지털 성범죄 예방과 처벌 시스템이 잘 구축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호주의 사례를 살펴보면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주에서는 디지털 성범죄를 ‘이미지 기반 학대’(Image Based Abuse, IBA)로 지칭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이미지를 통해서도 성적인 학대가 자행될 수 있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특히 호주는 뉴 사우스 웨일즈 주, 빅토리아 주에서 디지털 성범죄를 형사법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인식이 호주 법체계에 담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호주에는 이미지 기반 학대 촬영물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별도의 기구가 설립되어 있으며 호주 의회에서는 이 기구가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나 각종 웹사이트에 이미지 기반 학대 촬영물을 삭제하라는 통지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입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또한 피해자가 영상물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면 업체는 48시간 이내에 삭제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개인은 8천 600만 원 기업은 4억 3천만 원의 과징금을 물어야 한다.

이와 별도로 호주 정부는 이미지 기반 학대에 의한 피해자들의 고충을 처리하고 제반 시설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40억 원을 지원하고 있으며 희생자를 지원하기 위한 예산 82억 원을 배정해 디지털 성범죄로 인한 피해 회복을 돕고 있다.

이처럼 호주 정부가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엄중하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디지털 성범죄가 이전의 성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피해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지는 성범죄는 한 번이라도 피해를 입으면 영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되기 쉽기 때문에 신속하게 영상을 삭제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또한 형사처벌 및 징벌적 손해배상 등 강력한 처벌 규정이 마련돼야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다.

호주 정보는 기술의 발달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디지털 성범죄가 출현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제도적·정책적 체계를 마련했다.

디지털 성범죄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교육과 홍보, 피해 지원 등을 주관하는 인터넷 안전위원회를 설치, 디지털 성범죄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일례로 호주 안전국은 불법 촬영물에 대한 신고가 접수 되면 그 즉시 전담 조사관을 배정하며 48시간 내 삭제를 원칙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있으며 이르면 당일 최종 삭제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 외 피해자에게 상담 센터나 트라우마 지원 서비스를 연계해주고 변호사 및 경찰과 수월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된 문제를 전담하는 사실상의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있다.

호주의 이러한 사례는 현재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가해자의 처벌에만 급급하고 피해자에 대한 실효성 있는 보호나 피해 회복 시스템이 부재한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리나라는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과 불법성에 대한 국민적 인식부터 해외 선진국과 격차가 크며 이러한 인식이 n번방 사건과 같은 잔혹한 아동 디지털 성범죄가 일어나는 데 토대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제라도 디지털 성범죄의 불법성을 엄중하게 인식하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며 이러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는 체계를 새롭게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