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베·남초·지인 능욕… ‘n번방’ 잡고보니 10대 수두룩

입력 2020-04-02 17:04 수정 2020-04-02 17:11

수십명의 여성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이를 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 피의자 중 상당수가 10대인 것으로 드러났다. 미성년자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동안 사실상 제재가 없다시피 한 온라인 환경에서 이들이 성착취를 마치 놀이처럼 받아들이고 즐겼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찰에 따르면 2일 현재 ‘n번방’ 관련 피의자 140명 중 25명이 10대인 것으로 집계됐다. 최대 2만명이 접속한 단체대화방을 운영하며 성착취물을 유포한 ‘태평양’ 이모(16)군과 제2의 n번방을 개설한 ‘로리대장태범’ 배모(19)군 등 핵심 피의자 가운데에도 10대가 있었다. 또 지인의 사진을 음란물과 합성해 SNS에 공유하는 ‘지인능욕방’ 회원 중엔 교복을 입은 10대 가해자가 수두룩했다.

전문가들은 기성세대에 비해 텔레그램 등 모바일 기술에 밝은 10대가 온라인에서 일종의 ‘권능감’을 느끼는 것을 하나의 원인으로 봤다.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오프라인에선 권력과 자원이 있는 20~30대가 가해자인 경우가 많지만 온라인에서는 디지털 기술에 능숙한 10대 청소년이 권력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텔레그램 등 외국 SNS가 특별한 인증 없이 미성년자의 이용을 허용하면서 성착취물에 대한 10대의 진입장벽을 허물어버린 것도 한 원인이다. 이하영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활동가는 “과거엔 음란물 사이트에 접속하려면 최소한 성인인증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10대도 아무 제약 없이 온갖 성착취물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 성범죄에 대한 제재와 처벌 수위가 매우 약한 것도 10대 가해자의 죄의식을 무디게 했다. 유승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국장은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에도 수많은 온라인 성폭력 사건이 있었지만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범죄를 저질러도 걸리지 않고, 걸려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사회가 10대들에게 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갓갓’으로부터 n번방을 물려받은 ‘켈리’ 신모(32)씨는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텔레그램에서 ‘고담방’을 운영하며 1만건이 넘는 성착취물을 유포한 ‘와치맨’ 전모(38)씨에 대한 검찰 구형도 징역 3년 6개월에 그쳤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검찰은 지난달 말 부랴부랴 보강수사에 나섰다.

성인지 감수성이 낮고 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10대 가해자들은 제재 없는 온라인에서 성폭력을 하나의 놀잇감처럼 여기게 됐다.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성착취도 이들에겐 일종의 놀이문화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하영 활동가는 “‘일간베스트 저장소’ 등 대부분의 ‘남초 커뮤니티’에서 10대들이 지인 사진을 올리고 능욕하는 게 이미 보편적인 ‘놀이’가 된지 오래”라며 “하지만 그동안 제대로 된 문제제기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전국교육대학생연합이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텔레그램 N번방 가해자 엄중 처벌 및 교육계의 성인지 감수성 제고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가해자에 대한 확실한 법적 처벌과 성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 병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승진 사무국장은 “성착취물 제작 뿐 아니라 시청 역시 분명한 범죄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가해자들이 적법한 처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런 선례가 쌓이면서 청소년들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가고 있는지 직접 목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아름 활동가는 “왜곡된 성인식을 바로잡을 교육이 절실한 때”라고 말했다.

정우진 기자 uz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