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길 책임진다는 10년 자긍심 곤두박질”…냉장고는 창고로 전락

입력 2020-04-02 16:02 수정 2020-04-02 16:07
항공업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팬데믹·pandemic)으로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2일 대한항공 인천 기내식 센터 냉장실이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지난해 3월 하루 약 8만 식의 기내식을 만들던 이 센터는 현재 하루 2천900여 식만 생산하고 있다.

지난 1월까지만 해도 대한항공 기내식운영팀 11년차 직원 김모(38)씨에게 직장은 하늘을 날아오르기 전의 설렘과 긴장감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는 인천국제공항 근처 공장에서 비행기 이륙 소리를 들으며 하늘길 음식과 국내 기업의 물류를 책임진다는 자긍심으로 하루하루를 일해 왔다고 했다.

악몽이 시작된 건 코로나19로 국내 비행 노선이 줄어들기 시작한 지난 2월 초. 공장이 설립된 2001년 이후 하루 생산량이 3만 식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지난달 2일 처음으로 2만 식을 밑돌았다. 기내식 센터엔 과거 신종 플루, 메르스 때와 다른 차원의 위기가 왔다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1주일 후에는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던 1만 식 선도 뚫렸다. 이번주 하루 생산량은 2900식에 불과하다. 한때 하루에 8만9906식을 만들어내며 일일 기내식 최다 공급량을 기록했던 직원들의 자긍심은 곤두박질쳤다.

2일 인천 중구에 있는 대한항공 기내식센터에서 만난 김씨는 “직원 2000명이 작업장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던 생기가 두 달 만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이어 “권고사직이나 무급·유급 휴직으로 지금 출근하는 직원은 320명 뿐”이라며 “실직을 피한 직원들도 자긍심을 잃고 우울한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내식 업체는 승객 1명이 줄면 음식 2~3인분이 타격을 받는다. 항공업계 다른 분야와 달리 여객 수 감소의 충격을 2, 3배로 받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달 대한항공의 노선이 90% 이상 줄어들자 기내식 센터은 가동률이 5%로 주저앉았다.

항공업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팬데믹·pandemic)으로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2일 대한항공 인천 기내식 센터에서 직원들이 기내식을 만들고 있다.

95%가 멈춰 선 공장의 분위기는 고요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평소라면 쉴 새 없이 돌아갔을 음식 포장 작업대 벨트 20개 중 18개가 멈춰있었다. 나머지 2개만이 오전 시간에만 잠깐 가동됐다. 항공기의 승무원에게 음식을 배달하는 데 쓰이는 카트 8000개 중 6000개는 쓸모가 없어져 공장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신세가 됐다. “냉장고가 카트 창고가 됐다니까요”, 직원 한 명이 가리킨 냉장고 안에는 식재료 대신 갈 곳을 잃은 카트 수 천 개가 쌓여있었다

다른 냉장고엔 수 백 개의 오렌지 박스들이 있었다. 김세용 대한항공 기내식기판사업본부 수석은 “기내식은 예약률을 토대로 양을 줄일 수 있지만 과일이나 가공품은 그러기 힘들다”며 “대량 주문해놓은 게 나가지 않아서 냉장고에 방치해둘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항공업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팬데믹·pandemic)으로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2일 대한항공 인천 기내식 센터에 밀 카트가 텅 비어있다. 지난해 3월 하루 약 8만 식의 기내식을 만들던 이 센터는 현재 하루 2천900여 식만 생산하고 있다.

오전, 오후, 심야 등 하루 3교대로 바쁘게 일하던 직원들은 이제 오전 한 타임만 출근하고 있다. 한 작업장 당 200여명이 땀을 흘리며 일했었는데, 이젠 20여명만 나온다. 대한항공 기내식센터에 따르면 협력업체 6곳의 직원 2100명 중 500여명이 코로나19 이후 권고 사직됐다. 김 수석은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많은 직원부터 권고사직되는데, 짐을 정리하며 눈물을 흘렸던 한 직원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슷한 직원 수가 무급·유급 휴직 처리됐다.

남아 있는 직원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날 한국공항(대한항공 자회사)의 하청업체 EK맨파워는 직원 50여명에게 오는 24일자로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아시아나 협력업체 아시아나KO도 다음 달부터 무기한 무급휴직 및 정리해고에 들어간다. 대한항공 기내식업체 협력업체의 한 직원은 “감염병이 문제다보니 원망할 곳도 없어 더 답답하다”며 “언제 상황이 나아질지 알 수가 없어 하루하루 버티고만 있다”고 말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