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다큐소설] 청계천 빈민의 성자(13): 일본 파시즘

입력 2020-04-02 09:49 수정 2020-04-02 09:51
註: 예수와 같은 헌신적 삶을 살고자 1970년대 서울 청계천 빈민들과 함께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와 빈민운동가 제정구 등이 겪은 ‘가난의 시대’. 그들의 삶을 통해 복음의 본질과 인류 보편적 가치 그리고 한국 교회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큐 소설이다.


1931년 나는 교토에서 태어났다. 일본 관동군이 류타우거우 만주 선로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면서 ‘만주사변’의 발단으로 삼았던 해이다. 중국의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와 이시하라가 꾸민 음모였다.

그들은 만주 선로 폭파가 군벌 장쉐량이 한 짓이라고 주장하며 전면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갔고 일본 내각이 이를 기정사실로 해서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들어갔다. 극동 아시아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교토는 한국으로 치자면 경주와 같은 고도(古都)이다. 사람들은 매우 보수적이었으며 교토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분지를 이루고 있는 이 도시는 여름에는 30도가 넘을 정도로 무덥다. 겨울 날씨는 좀처럼 영하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겨울이면 냉량다습한 공기가 분지에 괴어 으슬으슬 추웠다.

서울 용두동 청계천고가 축. 청계천 고가 철거 후 기념물로 남긴 것이다. 1960~70년대 이 지점을 시작으로 하류 둑방을 따라 거대 빈민촌이 형성됐다.

내가 자란 곳은 지금의 교토역 북쪽에 자리한 이시진(西陣)이라는 곳이다. ‘서진’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군의 병영이 있던 곳인데 조선 정복에 나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곳 교토에 머물 때 구축한 군사도시인 셈이다.

때문에 이곳은 병참 관련 시설이 많았고, 자연히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이 많았다. 내가 태어나던 무렵은 일본이 식민지 전쟁에 나서던 때라 자연히 군수물자 공급을 위한 경공업이 발달하게 됐다.

전쟁에 몰두하기 전엔 일본의 최고급 기모노를 생산하는 전통적 의류산업 지역이었다. 서울 광장시장 한복 상가와 비슷했다.

어렴풋한 기억이다. 내가 네다섯 살 무렵 노무라 가(家)는 이시진에서 직물 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을 했다. 할아버지가 탄탄한 공장을 했을 정도면 우리 집은 꽤 부유했던 편이다.

기모노를 생산하던 직물 기계는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군복 등을 생산하는 직물 기계로 용도가 바뀌었다. 시대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은 조선 사람들이 할아버지 공장을 드나들며 부품을 사 가던 장면이다. 검정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조선 여성의 모습이 그 어린 눈에도 꽤 인상적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조선 사람에게 외상으로 부품을 선뜻 대주곤 했다. 직원들이 말리는 눈치였으나 두 분께서는 개의치 않고 외상을 허락했다.

가끔 외상으로 가져간 사람들이 외상을 갚지 않아 직원이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만큼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계속>

작가 전정희
저서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한국의 성읍교회’ ‘아름다운 교회길’(이상 홍성사), ‘아름다운 전원교회’(크리스토), ‘TV에 반하다’(그린비) 등이 있다. 공저로 ‘민족주의자의 죽음’(학민사),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청한)가 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