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위기는 기본으로 돌아가게 한다 : 의식(Awareness)편

입력 2020-03-31 14:40

박계문 목사
전 이랜드 사목
캐나다 트리니티 웨스턴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ty) 박사(D.min.) 과정

본문 : 고린도 후서 13장 5절

“너희 미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요즘 글로벌 현상이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입니다. 거리를 두는 것은 현재는 고통이지만, 심리적으로 안정을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도시는 밀집되어서 사람간의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가까워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심리적으로도 가족은 45센티미터가 적정 거리라고 합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는 1.2미터입니다.

소비문화도 패턴이 달라졌습니다. 충동과 과다 소비에서 절제와 필수 소비화로 변했습니다. 일전에는 자본 사회의 기본 원칙인 소비가 미덕이었지만, 요즘은 소비가 눈치입니다. 운송도 다 멈추었습니다. 모든 곳이 차단 자단, 조심 조심입니다.

현재 하나님이 멈춰! 라고 온 인류에 사인을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9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은 무엇인가 짜릿한 것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요?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만족과 삶의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고 싶은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인들의 성격이기도 합니다. 하늘을 보고 날씨는 구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천기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단지 원인이 균(virus)이라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가운데, 여러 곳에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찌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통찰력(spiritual insight)을 말합니다.

이 사인, 글로벌 대유행 현상은(Global pandemic phenomenon) 엄중한 경고 이면서 자중을 당부하시는 사인(sign)입니다. 내 앞을 너무 앞서서 간다는 경고사인입니다. 좀 거리를 두어! 너무 너희들끼리 즐기면서 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도저히 이해 불가한 도 넘는 짓 거리에 놀지 말고, 놀아나지마! 라는 경고입니다. 어떻게 느끼십니까?

몇 칠 전, 이런 상황에서 어느 목회자가 환상을 보았다는 장문의 내용을 페이스 북에서 확인 한적이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교회 이름과 주소까지 오픈 합니다. 은근히 자기 교회 만이 하나님의 영이 살아 있다는 것이 아닌가요? 다른 교회는 환상을 보지 못하니까? 교회가 아냐? 하는 암묵의 메시지요……

사도 바울도 고린도 후서12장 1절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 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노라”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던 이야기를 합니다.

왜 바울이 자신의 환상을 본 사건을 무익하다고 할까요? 엄청난 일인데요? 자신의 신적인 존재로서 존재감과 관심을 가질 수 있는데도요. 영적인 미끼를 던질 수 있는데도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환상과 십자가의 사건과는 별개 처리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적인 환상의 믿음”을 “보편적, 객관적 신앙”으로 착각한다면 위험한 신앙입니다. 물론 주관적으로 이러한 영적인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인 진리로 꾸미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본문 13정5절에, “너희 믿음 가운데 있는지 시험하여 보라” 했습니다.

이러한 환상이 믿음이라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이러한 환상은 사탄도 동일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말씀을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유일하게 사탄은 말씀을 통해서만이 굴복 시 킬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반드시 점검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정경(Cannon) 입니다. 세상의 표준을 재는 잣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환상을 통해서만 생긴다면 신비주의 중독자입니다. 말씀을 통해서는 어떤 위로를 받을 수 없다면 자신이 믿음이 지금 말씀 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매일 성경을 읽고 말씀을 나누는 것 보다 이러한 환상이 말씀보다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자신이 체험했는데도, 2절에, “그는 사십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그는” 이라는 3인칭 단수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상황이든지 신앙을 점검하는 겸손함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셋째 하늘을 경험했는데도 내가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한국의 뉴스를 살펴 보니, 한국 사회는 이러한 거리 두기(distancing)가 다시 예전처럼 복원 되지 않았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의 거리 두기에 너무 익숙하지 못한 사회 분위기 일수도 있습니다. 또한 한국 특유의 정 문화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 정(情)이 무너지면 한(恨)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한국어가 글로벌 용어로 된 것이 화병(火病)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지(recognition)만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인지는 잠시 주의하고 살피는 본능적인 태도입니다. 이것 가지고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의식 수준이 인지 수준을 일 수 있습니다. 인지는 자신은 알지만, 사회 문화와 공동체에 이로움을 주고 선한 영향력을 주는 수순은 아닙니다.

이 시점에 중요한 것은 의식(Awareness)의 변화입니다.

영적인 신앙 가치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점검하는 훈련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통한 지각의 운동 입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는 순종하는 교인은 키워 냈지만, 의식하는 신앙인은 키워내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심리학적인 용어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한번 점검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와 나의 신앙의 의식이 지금 어느 정도(수준)인지 생각 보셨는지요?

데이비드 호킨스는 “의식 혁명” (사회 심리학적인 책으로서 인용) 에서 말하길,

인간의 의식에는 힘(power)과 위력(force) 이 있다고 합니다.

먼저, 이 힘(power)은 생명체의 의(義) 곧 창조적인 에너지를 생성한다고 합니다. 이 힘은 이롭게 하는 에너지 입니다. 그래서 요즘 21세기에는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분야가 뇌 과학 분야와 인간의 보이지 않은 의식에 대한 연구 분야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위력(force)은 인간을 우둔하게 하고, 강압하게 하고, 정당화를 요구하고, 결정적으로, 상대적인 저항력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항상 그 자체 에너지가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합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19도 막기 힘든데, 입이 쫙 벌어지는 사건(N방 사건)이 터졌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충격이 크면 일시적으로 말을 못하듯이, 지금 우리네 사회가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입을 떼며 한 마디, “어쩌다가 이 사회가 이지 경까지 갔는가?” 입니다.

그리고 어디엔가 숨어서 사정없이 사람들을 파멸하는 거대한 악마적인 좀비 공동체가 다닥 다닥 있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가는지요? 육체를 갉아먹고, 영혼을 갉아먹은 억울한 사연들이 결코 용서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한 듯 합니다.

의식이 다 파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의 타성이라는 괴물이 이 좀비 공동체들을 용납하며, 쾌락의 괴성을 지르고 있지 않은지 의심스러운 슬픔을 억 누 룰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라진 좀비 사회라고 하면 지나친가요?

교회는 무엇을 하였는가? 매일 보도에는 8만 여 개의 교회와 1200만 성도라고 하는데 요지경인지요? 다들 힘들 때 위로해야지 이런 말하는가? 너무 교회에서 예쁜 언어 사랑스런 가식의 언어를 멈추고 현실을 직시 하였으면 합니다. 고상 한 체 할 때가 아닙니다. 전시 상태입니다. 악한 자를 불화살이라고 (엡 6장16절) 표현 하고 있는데, 소멸 할 수 있는 힘(power)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어디를 보나 위기에는 회개가 최우선이었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실체를 토해 내야 진정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 입장에서 글로벌 재앙이 회개 없이 수습이 될까 의심스럽습니다.

교회와 신앙은 위력(force)적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와 신앙은 힘(power)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와 지도자들은 위력을 얻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기회를 엿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입니다. 힘 빠진 신앙과 힘 빠진 교회는 끊임없는 위력(force)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로마서 12:2에서,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여기에서 마음은 “의식”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본문에 고린도 후서 3장 15절 하반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 다음 구절은,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아무 가치가 없는 자입니다. 땔감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처럼 버려질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3-24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의식의 변화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언제? 매 순간, 날마다입니다.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무엇이든지,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노라.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가 네 삶에 중심이라는 것을 의식(Awareness)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emptiness)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fullness)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의식에는 힘(power)이 있습니다. 이 힘은 에너지(energy)라는 성령의 생명체입니다.

이 생명체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고 후 10:5) 복종한다는 의미는 전심 전력으로 간구함을 말합니다.

생각을 사로잡아야 진정한 새로운 생명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밀착된 군중 속에서는 절대로 신성한 에너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공간에 너무 많은 사람이 있으면 산소 부족 현상이 일어납니다. 뇌 기능의 약화와 다양한 부작용으로 의욕 상실 등 육체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선한 공기가 필수적인 것처럼, 예수님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 하셨습니다. 일명, 영적인 거리 두기(spiritual distancing)입니다. 그분도 한 적 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골방이 영적 거리 두기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혼자 있는 법에 너무 소홀히 하고 익숙하지 못하고 어색하기 까지 했습니다.

E.M 바운즈는 말하길, “오늘날 교회가 필요한 것은 더 좋은 조직이 아니다. 성령이 사용 하 실 수 있는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 기도에 강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성령님은 방법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흘러 들어 오신다. 그는 계획이 아니라 사람, 즉 기도의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으신다”

F.F 브루스는 이를 가리켜, “퍼져 가는 불꽃”이라고 합니다. 악마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성령의 불꽃(에너지) 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 “물 안에 있을 때는 배가 침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 안에 물이 들어왔을 때 배는 가라앉는다” 고 합니다. 교회가 소비 문화에 마케팅 문화에 가라 앉고 있습니다. 사회는 건전하게 여과(filtering)할 수 있는 문화가 상실되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상실의 시대입니다.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의 한 소경이 제자들 보면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쳐다봅니다. 한 푼 줍쇼 한 것입니다. 물론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힘(power)이 지금 교회와 크리스천들에게 별로 없습니다. 교회가 세속화에 사정없이 휘둘리고 있습니다. 진정한 힘이 없으니까요. 진리가 없으니, 영적인 자유 함이 없는 것입니다.

의식의 변화를 통해서 힘을 회복해야 합니다. 위기에서는 무엇 보다, 영적 의식 점검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점검해야 할 필수적인 영적인 무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