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정부, 헝가리에 수교 대가로 1억2500만달러 전달했었다

입력 2020-03-31 12:15

노태우정부가 1989년 2월 동유럽 국가 중 처음으로 헝가리와의 수교를 맺기 위해 1억2500만 달러 규모의 은행차관을 제공한 사실이 외교문서를 통해 31일 확인됐다. 헝가리는 경제난 극복을 위해 한국과의 수교를 결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헝가리는 또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국과의 상주대표부 설치 사실을 20여일 가까이 뒤늦게 알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날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한국과 헝가리는 두 차례 협상을 통해 1988년 8월 ‘상주대표부를 설치하고 그 이후 수교 교섭에 들어간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합의 의사록에 서명했다. 합의 의사록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통상 외교문서는 상대국 입장 등을 감안해 30년간 비공개 처리한다.

합의 의사록을 보면 ‘한국이 헝가리와의 수교를 위해 6억5000만 달러의 경협자금을 제공하고 특히 약속한 은행차관(2억5000만 달러)의 절반인 1억2500만 달러를 헝가리에 제공한 뒤에야 수교한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실제로 한국은 1988년 12월 외환은행과 산업은행 등 8개 은행이 헝가리 중앙은행에 1억2500만 달러 규모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국과 헝가리는 1989년 2월 1일 수교를 맺었다.

헝가리는 경제난을 해결할 목적으로, 한국과 수교에 나선 것으로 파악됐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헝가리는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국과 수교를 맺는 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점차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한국과 수교를 맺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외교문서를 보면 헝가리가 수교를 대가로 한국에 경협자금 15억 달러를 요구했다. 우리 정부는 4억 달러로 맞섰다. 이후 헝가리는 10억 달러에서 8억 달러까지 요구액을 낮췄고 6억5000만 달러에 합의하기로 결정했다.

헝가리는 한국과 수교를 맺으면서 북한을 크게 의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 나라가 상주대표부 설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한 것은 1988년 8월 26일이었지만 이를 양국이 공식 발표한 것은 9월 13일이다. 합의 사흘 전인 8월 23일 김일성 주석의 아들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이복동생인 김평일이 주헝가리 대사로 부임해 신임장을 제정한 것을 비롯해 북한 정권수립일(9·9절)에 헝가리 대표단이 방북해야 하는 상황 등을 감안한 헝가리정부 요청에 따른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한국과 헝가리가 수교를 맺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북한은 즉각 반발했다. 당시 노동신문은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헝가리와의 단교를 시사했고, 김평일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아울러 헝가리와의 외교관계를 대사대리로 격하할 것을 통보하기도 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