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부터 대법원, 서울고등법원 청사에서 법원 보안관리대 직원(옛 방호원)으로 근무해온 유하식(60) 보안주사가 오는 6월 정년퇴직한다. 서울고법은 그를 상반기 퇴직 공무원 포상 대상자로 추천하며 “민원인들에게 친절했고, 재판이 아무런 사고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유씨는 지난 27일 서울법원청사 서울고법 동관 출입구에서 마스크를 쓴 채 법원 방문객의 동선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는 “평생 봐온 건 근심을 껴안고 법원으로 들어오는 민원인들이었다”고 말했다. 유씨는 “비록 내가 판결을 내릴 수는 없지만, 세상의 죄와 분쟁이 전부 사라져 모두 행복해졌으면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800m 중거리 육상선수였던 그는 부친이 일찍 작고한 등의 사정으로 체육고등학교를 중퇴했다. 튼튼한 몸을 믿고 일찍부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전화국 인부, 자동차 정비소 직원으로 살던 그는 27세에 검정고시로 고교 졸업 자격을 취득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91년 대전지법 서산지원 게시판에 붙은 법원 보안관리대 직원 모집 공고를 보고 ‘잠깐만 해 보자’ 하는 생각으로 응했다. 92년 2월 첫 출근 이후 28년, 그는 정년퇴임 대상자가 됐다.
‘자유·평등·정의’가 새겨진 제복을 입은 그는 “매일 출근이 긴장됐다”고 말했다. 따뜻한 법원, 다가가는 법원…. 법원을 친근하게 표현하는 말이 넘치지만 유씨는 “법원이란 무서운 곳 아니냐”고 했다. “송사를 하다 보면 한이 맺히고, 좋던 사람도 변하잖습니까.” 그는 민사재판에 들어서던 당사자의 가방에서 망치와 시퍼런 회칼을 잡아내 압수한 일이 있다. 법정에서 피고인이 의자를 집어던지며 소란을 피울 때에도 긴급하게 투입됐다. SK 최태원 회장이 법원에 오던 날에는 몰려든 이들을 제지하느라 마치 경호원처럼 일하기도 해야 했다.
법원은 죄를 심판하고 분쟁의 잘잘못을 가리는 곳이었다. 그가 서울고법과 대법원에 서 있는 동안 한국의 대통령 4명이 법정에 서서 심판을 받았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수의를 입고 대법정으로 들어갈 때에도,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이 호송차에서 내려 걸을 때에도 유씨는 물끄러미 그 장면들을 지켜봤다. 그는 “잘못을 해서 죄값을 치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 됐다는 마음도 들더라”고 말했다. 유씨는 “나는 정치를 모른다”며 대통령들의 인상에 대해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유씨는 대신 “30년 가까이 법원에 있다 보니 ‘아무도 미래를 모른다’는 생각만 든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재판받는 이들을 눈 아래로 보고 싶지가 않다”고 덧붙였다. 법원에는 똑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이들이 자주 찾아온다. 알 수 없는 종이 몇 장을 들고 눈물짓는 이들을, 유씨는 웬만하면 매정하게 내쫓지 않았다. 이야기를 유씨가 잠자코 들어 주면 민원인들은 발길을 돌리며 “그래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유씨는 “남의 일 같지는 않았다”고 했다. 유씨는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금전 문제로 법원에 가실 때 손을 잡고 두려운 맘으로 따라갔었다”고 말했다.
서울법원청사 동관과 서관, 중앙통로를 그만큼 바삐 오간 이는 없었다. 그는 “내 자리는 따로 없었다. 1층과 2층이 다 내 자리였다”고 했다. 그는 시간에 임박해 법정을 찾는 사람과 함께 복도를 달렸고, 검색대 투시기 앞에서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유씨의 가족은 그의 정년퇴직을 자랑스러워 한다. 유씨는 사실 법원 보안관리대 가족이다. 그의 친동생(54)이 대전지법 공주지원에서, 그리고 둘째 딸(28)은 아버지와 같은 서울고법에서 보안관리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유전이라는 게 있나 보다”며 웃었다.
유씨는 “퇴임 뒤엔 어디서 경비원 생활이라도 해야 할텐데, 일단 공부부터 하련다”고 말했다. 제때 고교를 졸업하지 못했던 그는 지금 서울디지털대 부동산학과 4학년, 그리고 방송통신대 법학과 3학년 과정을 밟는 만학도다. 아직도 보안관리대 후배들에게 팔굽혀펴기 시합을 청해 지지 않는다는 그는 여전히 젊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계속할 계획이다. 그는 “법원에 들어오는 이들의 모든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 왔다”며 “인생은 조심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