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다 다친다. 절대 앞장서거나 나서지 마라. 근면 성실하게 농사짓고 살아라”
서울 종로에서 소소하게 작은 한의원을 운영하다 생을 마감한 사람. 1984년 우연히 계명대 박사과정의 한 학생이 유가족들도 모르는 자료를 가져와 논문을 쓰고 싶다고 찾아왔다. 그때부터 시작된 독립유공자 등록 과정은 무려 25년이나 걸렸다. 대체 그는 누구일까?
한일청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대 2학년에 다니던 1926년 ‘6·10 만세운동’ 때 태극기와 격문을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격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천만 동포여 원수를 구수(拘囚·잡아가두다)하라!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이후 경성지방법원 조사국으로부터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1927년 3월 결국 연희전문 3학년 재학 중 퇴학당했다. 학업을 중단하게 된 그는 잠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9년 4월부터 일본 도쿄에서 잡지 ‘조선운동’의 기자로 활동했으며 ‘도쿄학생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5월경 귀향한 뒤에는 석유상점 및 ‘중앙일보’ 예천지국을 운영했다. 이때 그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30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1931년 2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그는 그해 가을 경북 각 지역의 신문 기자들이 결성한 ‘보도협조망’에 참여했다. 1932년 6월 경북 예천군에서 박호철·김기석 등과 함께 적색 농민조합을 조직, 조선의 독립과 농민의 권익향상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1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총책임 및 사무부를 담당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향상 및 계몽을 위한 활동의 목적으로 예천 우편소 내에 지부인 ‘적색독서회’를 조직했고 1932년 예천농업보습학교의 동맹휴교를 지도했다. 특히 그는 ‘재경성학생 사회과학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운동을 벌였다. 교사들과 농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펼치다 1933년 3월 일본 경찰에 검거돼 이듬해 5월 경성지법에서 다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1945년 해방 직후 예천군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그해 9월 개최된 전국 인민대표자대회에 예천군 대표로 참가했다. 예천군 농민위원회 및 청년동맹 결성도 주도했고 이때 제2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한의사로 활동하면서 동양의약대학(현 경희대학교 한의과 대학 및 약학대학) 강사로 병리학을 강의했고 한의사시험 출제위원, 대한한의사협회 이사, 서울특별시한의사회 부회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하지만 해방된 대한민국은 그를 독립운동가로 대접하는 대신,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해방 직후 벌어진 반공주의 사상과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며 과거 그가 어디에서 공부했는지, 어느 단체에서 활동했는지로 삶 전체가 평가되었고 끔찍한 연좌제가 시작됐다. 한일청은 자녀에게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끝내 알리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 학생의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그의 과거 사료가 발견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당시 한일청과 그의 동료를 심문했던 일제 검사 유원무(柳原茂)가 관여한 사건 판결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피고인들은 모두 민족의식이 치열하며 더구나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있는 자이다. 조선을 일본제국의 굴레로부터 이탈시킬 것과 함께 조선 내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주의사회를 실현할 목적으로 적색농민조합이란 비밀결사를 조직…위 조합의 목적이 조선독립과 공산사회실현에 있다는 내용의 공술 기재를 종합하여 이를 인정한다” 한일청은 이때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1935~1936년의 국제적 위기에 있는 피압박 민족은 그 해방을 만들려고 하고 있음에도 우리들 조선인만 묵과하면 안 되며, 조선의 사상운동은 조선공산당 검거 이후 침체 되었으니 우리들은 이 재건을 계획하는 것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판결문과 심문조서를 보면 때로는 괜히 들여다 봤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가 알던 어느 영웅이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매우 비굴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고, 평범해 보였던 어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끝까지 조선독립을 원했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사람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이를 때는 가장 진실해지는 법이다. 그 누구도 보고 있지 않고, 자신의 행동이 역사로 남을 거라는 것도 모른 채 끝까지 신념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다. 한일청은 그러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후대에 존경받을만한 위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는 공산주의라는 단어에 민감하다. 물론 10대부터 30대까지는 어느덧 전쟁 70년이 지나 심리적 거리가 멀어졌지만, 여전히 6·25전쟁의 아픔은 이 나라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대적 상황이다. 지금의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외친다면 필시 많은 사람이 반감이 생기겠지만, 100년 전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왕이 존재했고, 신분이 존재하여 인간의 등급이 나뉘어 있었으며, 수많은 ‘운동’들이 우후죽순 발생했던 시기였다. 처음으로 독립운동에 남녀가 어딨냐며 여성 의병장이 된 윤희순 의병장이 있고, 독립운동에 신분이 어딨냐며 노비 출신, 백정 출신, 농부 그리고 상인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당시 백정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큰 죄에 해당했다. 이러한 신분제도를 없애기 위해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만민공동회 등이 연달아 일어났고, 특히 만민공동회에서 첫 연설자는 백정이었다는 건 주목할 만하다.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군대를 강제 해산시킨 뒤, 고종황제를 독살했던 때, 너도나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서는데 신분이 미천하여 뜻을 펼칠 수 없었다. 그 시기 낮은 신분 계급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계급해방운동, 농촌운동 등에 가담했고, 그런 단체의 결속력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이가 매우 많다. 당시 일제와 싸운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동지를 모아야 했다. 동지가 모이면 단체가 만들어지고 단체가 유지되려면 단체강령, 행동강령, 규정 등이 필요했다. 종교의 경우 법전, 경전 등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당시 수많은 백성은 공산주의라는 한 정치이론을 항일운동과 신분 해방운동의 적합한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했듯 당시의 세상은 인간의 존재가 출신, 지역, 집안에 따라 법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세상이었다. 또한, 6·25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 나아가 일제의 교활한 간섭으로 인해 발발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6·25전쟁으로 인한 우리의 아픔이 크다고 해서 당시 전쟁과 무관하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수단이자 방법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이용했던 순국선열, 애국지사들까지 우리가 죄를 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 전체 독립운동계열 중 사회주의 계열, 아나키즘 계열이 70% 가까이 되기에 이들을 부정하면 우리는 독립운동사의 3분의 2를 삭제하고 검열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분야, 영역에서 그 존재로서 가치가 있고 역할을 수행한다. 일제강점기 공산주의 이론을 택했던 독립투사들, 무력항일투쟁에 앞섰던 사회주의 계열, 아나키즘 계열 독립투사들이 없었다면 독립운동 자체가 이어지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임시정부에서 ‘한인애국단’이라는 의열단체를 만들어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게 했을까? 이로 인해 중국 국민당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 한중연합작전이 활성화되고 존립이 위험하던 임시정부가 활력이 생긴 것은 명징한 역사로 남아있다. 우리가 공산주의라는 단어 하나로 가볍게 판단하고 평가하며 비난하기에는 이들의 삶은 참으로 처절했고 단단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농부가 그토록 처절했단 말인가?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공산주의 사상을 듣고 그렇게 수십 년간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는가? 비단 농부, 백정, 상인들뿐이 아니다. 당시 사회에서 소위 엘리트라 불리던 지식인들 대다수가 공산주의 이론을 접했음에도 역사는 그 흔적을 가리고 있다. 공산주의가 나쁜 것인가 아니면 공산체제에서 독재가 나쁜 것인가? 민주주의가 나쁜 것인가 아니면 민주체제에서 독재가 나쁜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어느 경우든 독재체제가 나쁘다면 과연 수백만 명의 당시 백성들이 스탈린과 김일성 같은 공산 독재를 꿈꾸며 수십 년간 고문받고, 수감생활하고, 도망 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말인가? 한일청의 마지막은 한의학 분야에서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평소 임상에서 이진탕 처방을 잘 사용해 ‘이진탕의 명수’로 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60년 11월 29일 한 많은 세상을 떠났고, 2009년 8월15일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건립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정상규 작가는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통해 숨겨진 위인을 발굴해왔다. 현재 ‘국가유공자 지원 시민단체 포윅스’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독립운동 맞습니다’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