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판사들이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추진하는 아동·청소년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의 설정과 관련해 재검토를 요청했다. 양형위의 설문조사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다. 텔레그램 ‘박사방’ 사건이 이 같은 건의의 계기가 됐다.
26일 대법원에 따르면 대법원 젠더법연구회 소속 판사 13명은 지난 25일 법원 내부망 ‘코트넷’에 글을 올려 양형기준 마련을 위한 심의를 전면적으로 다시 해 달라고 요청했다. 판사들은 “미성년 여성을 협박해 성착취 영상을 촬영하게 하고, 이를 유료로 운영하는 텔레그램 비밀방을 통해 유포한 n번방 사건은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며 “이런 유형의 범죄는 다른 디지털 범죄와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디지털성범죄는 이미 사회에 만연하지만 양형기준이 들쭉날쭉하다는 지적이 그간 많았다. 대법원이 이달 들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범죄 양형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범죄의 심각성과 중대성이 담기지 못했다는 게 이들 판사들의 지적이었다. 판사들은 “설문에서 예로 든 사안이나 기준이 되는 형량 범위, 가중·감경 사유로 든 사유 등 그 무엇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며 “피해자는 물론 일반 국민도 납득하기 어려운 양형기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설문조사는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제작 등의 사례를 제시하고 판사들이 객관식으로 합당한 형량을 고르도록 하는 식이었다. 다만 판사들은 우선 양형기준의 설정 선택지로 제시된 양형 자체가 지나치게 낮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설문조사에서는 14세 여아를 대상으로 한 성착취 영상 제작의 양형 보기의 범위로 ‘2년 6개월∼9년 이상’을, 영리 목적 판매 및 배포의 경우 ‘4개월∼3년 이상’이 제시됐다. 판사들은 “성착취 영상 제작·판매·배포·확산이 피해자에게 가하는 피해의 정도를 고려할 때 보기로 제시된 양형의 범위가 적절한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들 판사들은 형량의 감경사유로 “아동 피해자의 처벌불원(처벌을 원하지 않음)” “피해가 경미한 경우” 등이 포함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판사들은 양형기준 마련을 위한 설문을 다시 진행하면서 보다 복잡·다양한 형태의 범죄 유형에 대해 심도 있는 조사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국민과 전문가 의견을 수렴할 공청회 개최, 양형위 구성에서의 성비 다양성 확보도 요청했다. 판사들은 “디지털 성범죄의 본질은 음란물 유포가 아닌 성학대와 성착취, 즉 지배와 폭력이고, 그 피해는 사회적 유포로 인해 새롭게 추가되며 발생한다”고 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