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기조차 무의미” 말단기업 코로나 도산 공포[이슈&탐사]

입력 2020-03-26 10:18 수정 2020-03-26 13:44

현대자동차에 부품을 대던 A업체는 지난주 도산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지난달까지 중국산 물품 조달에 차질이 생겼다. 중국산 물품이 들어와야 부품을 만들어 납품 하는데, 이런 공정 자체가 모두 불가능해졌다. A업체 파산 절차를 진행하는 법률 대리인은 신청서에 “코로나19 때문에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적었다.

코로나19 충격은 줄도산 공포로까지 번지고 있다. 기초체력이 취약한 중소기업, 해외시장에 주력해왔던 수출기업부터 절벽으로 떠밀리고 있다. 하청업체의 경우 대기업이 맞는 위기의 몇 배를 맨 몸으로 막아내고 있다고 토로한다.

말단부터 시작된 도산 공포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대구는 이미 줄도산 움직임이 감지된다. 법무법인 송암 서화정 변호사는 “대구 경북지역에서 공장, 법인체들이 법인 파산, 회생 요건에 자신들이 해당되는지를 묻는 문의가 늘고 있다. 코로나로 힘든데 더 버텨볼지를 고민하며 상담 받으러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화로 문의했다가 파산이나 회생에 드는 비용 이야기를 했더니 ‘그 돈 있으면 차라리 야반도주하겠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도산 절차 밟겠다고 오신 분들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분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린 김관기 변호사는 “법인 파산에 대한 문의가 비정상적으로 늘고 있다는 게 2월부터 느껴졌다”며 “기업들이 망가지는 속도는 법인 파산이 늘고 있는 수준 그 이상”라고 말했다.

가장 먼저 문을 닫는 건 산업 생태계 가장자리에 있던 업체들이다. 법무법인 린에는 최근 활성탄소 관련 회사가 파산·회생을 문의하러 찾아왔다. 이 업체는 활성탄소 제품을 개발하면서 수익을 위해 요리용 숯도 만들어 팔았는데 코로나19로 인한 자영업 연쇄 충격이 영향을 미쳤다. 월 7억원 매출이 1억원으로 내려앉았다고 한다.

B업체 사장은 코로나19 여파로 수입이 끊기면서 직원 퇴직금까지 밀리자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감염병 여파로 모든 게 멈추자 채무 상환도 못하고 임금도 못 주게 됐다는 것이다. 직원들은 업주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서 변호사는 “코로나19로 사업이 어려운데 이런 상황(고발)까지 되니까 파산 신청을 알아보려고 왔다고 했다”며 “직원 임금도 못 주는 상황이 되니 (도산) 절차를 이용해서라도 정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미 도산 위기에 직면한 기업들은 증가추세다. 대법원에 따르면 코로나 영향이 크지 않던 지난달 법인파산 접수 건수는 80건으로 1월(71건)과 지난해 2월(71건)보다 늘었다. 파산을 결정하고 준비하기까지는 대개 2~3달 걸린다. 그래서 시차를 고려하면 이번 달과 다음 달 법인파산 건수는 더 증가할 우려가 크다는 게 관련 변호사들 예측이다. 지금 상황이 마지막 골든타임일 수 있다는 경고다.

뉴시스

대구의 한 파산 전문 변호사는 “도산 절차는 마지막 수단이다 보니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기간이 지나고 나면 (법인 파산 등이) 본격 가시화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린 최승관 변호사도 “개인사업자가 (코로나19 등으로) 직격탄을 맞는다면 법인들은 경기에 의해 (파산 증가세가) 가속화한다”며 “예컨대 극장에 사람이 안 오면 극장만 망하는 게 아니라 극장에 납품하는 오징어 업체, 나쵸 업체 등이 전부 줄도산하는 식”이라고 우려했다.

과거와는 다른 상황
바이러스로 시작된 이번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와는 상황이 다르다. 외환위기는 동아시아에 국한된 위기였고, 2008년에는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시장의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전 세계가 동시에 멈췄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의 특성상 해외시장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경제 원상복구가 어렵다. 게다가 과거 위기와 달리 내수 부양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국경 봉쇄로 수출에서 받을 타격이 심각할 것으로 보이는데다 내수 부양도 쉽지가 않다”며 “과거에는 재정정책이나 금리정책을 쓰면 내수는 살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감염병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에 돈을 풀어도 소비와 투자가 늘기 어렵다”고 했다.

중소 업체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일감 절벽 상황이다. 정부의 정책자금 지원을 통해 당장 내야할 이자를 돌려막는다고 하더라도 수익을 낼 수 없는 사태가 지속되면 버티는 게 의미가 없다는 두려움이다.

이인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금은 어느 때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이다. IMF 때는 커다란 바위(대기업)가 떨어지는 걸 막아야 했다면 지금은 모래산(중소기업)이 흘러내려 무너지는 걸 막아야 한다”며 “본격적으로 수많은 중소기업, 자영업 등 모래알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막을 수가 없다. 이미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경고했다. 2007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고 2008년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이후 국내 법인파산 접수는 2008년 192건에서 2009년 227건으로 늘었다.

이 교수는 “부도가 나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발생할 것”이라며 “중소기업이 무너지면, 중소기업 대표들이 끼고 있던 개인대출, 가계대출까지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럼 부동산시장까지 같이 무너진다”고 우려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도 “실물경제에서 시작된 위기가 금융을 거쳐 다시 실물경제로 번질 것”이라며 “1~2분기의 시차를 두고 부동산 시장 등으로 타격이 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중소기업이 무너지면 산업 전반에 위기가 올 수 있다며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 현장에 조속히 닿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검토 중인 보험료 및 공과금 유예·면제도 사태 장기화 시 고려해 볼만 하다고 제언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보증 공급, 정책금융기관의 대출 지원 등은 의미 있는 방안이며 신속하게 현장에 적용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정식 교수는 이번 긴급부양책에 대해 “유동성 공급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이라며 “사태가 장기화되면 법인세 인하, 조세 지원·감면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웅빈 김판 임주언 박세원 기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