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강제징용공 표기를 아베 신조 정권의 입장과 비슷한 중립적인 표현으로 바꿔 사내 기자들과 독자들의 반발을 샀던 재팬타임스 편집국장이 25일부로 사임한다. 그의 퇴임과 함께 재팬타임스는 위안부 관련 표기를 되돌리기로 결정했다.
일본 영자신문 재팬타임스는 지난 20일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표기 변경은 부적절했다”며 “우리 신문의 편집 방침에 대한 비판과 혼란만 야기했다. 정치적 외압에 굴복했다는 잘못된 추측도 이어졌다”고 밝혔다.
신문은 지난 2018년 11월 미즈노 히로야스 편집국장 주도 하에 ‘강제징용공(forced laborers)’ 표기를 ‘전시노동자(wartime laborers)’로 바꿨다. 또 위안부라는 단어의 정의도 ‘일본군에 성 제공을 강요받은 여성(women who were forced to provide sex for Japanese troops)’에서 ‘자기 의사에 반한 이들을 포함해, 전시 일본군 위안소에서 일하며 성을 제공한 여성)’으로 변경했다. ‘강제성’이라는 의미가 빠지면서 전쟁범죄 책임을 외면하는 현 일본 정부의 입장과 유사한 표현이 된 것이다.
신문은 내부 논의 끝에 “위안부 관련 변경된 규정은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며 ‘2차 대전 전과 전쟁기간 동안 일본군 위안소 제도 하에 고초를 겪은 여성(women who suffered under Japan’s military brothel system before and during World War II)’으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납치, 사기, 가난 등 다양한 맥락 속에서 강요와 협박을 받은 이들’이라는 의미가 포함됐다. 다만 전시노동자의 경우 징용공 배상 판결을 존중한다면서도 당시 조선인 근로자의 형태가 다양했다는 점을 감안해 변경된 표기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여년간 이어진 재팬타임스의 표기 내홍은 편집국장의 사임으로 일단락됐지만 언론의 존재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두려워하지 않는 보도, 치우치지 않는 보도’라는 슬로건 아래 자유로운 논조를 지지해온 재팬타임스 기자들은 그간 편집국 상부의 표기 변경 결정에 거세게 반발해왔다. 회사 오너와의 만남 중 해당 결정에 분개하며 눈물을 흘리는 기자도 있었다.
기자들의 기본 입장은 정부 입장과 유사한 표기 변경으로 독자들의 신뢰를 잃을 경우 저널리즘으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 표기 변경 후 해외 독자들을 중심으로 거센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반면 미즈노 국장은 “반정부 매체로 치우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반일 언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다는 그의 설명에 기자들은 “저널리즘의 자살 행위”라며 반발했다.
표기 변경 갈등은 정치권 외압 논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미즈노 국장은 외압은 없었다고 단호히 부인했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관저의 압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강조했다. 현지에서는 정부가 직접 외압을 넣었다기보다 광고 등 정부 지원을 의식해 재팬타임스가 알아서 몸을 낮췄다는 분석도 나왔다. 벳푸 미나코 호세이대 미디어사회학 교수는 “언론사에 국가의 논리, 경영자의 논리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로이터통신은 23일 재팬타임스 내부회의록을 입수해 “미즈노 국장이 ‘회사의 생존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경위야 어떻든 경영진의 책임이 크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표기 변경 문제가 아닌 경영 악화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고 밝힌 것이다. 한 직원은 회의 중 사측에 “표기 변경이 경영상 손실로 이어진 게 아니냐”고 물었다. 표기 변경으로 실망한 독자들이 구독을 끊었고 이것이 경영 악화로 이어진 게 아니냐는 의미였다. 재팬타임스 회장은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