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민간 동원해 30조 채권-증시안정자금 생색
“은행 정부 조력자 대신 위기 주체 가능성” 우려
한국과 미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내놨던 대책들을 다시 총동원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기세가 심각함을 반영한다. 하지만 양국의 정책은 무늬와 결에서 차이가 있어 보인다. 한쪽은 무한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반면 다른 한쪽은 생색내기와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양새다.
① 최종대부자 미 연준은 무한책임, 한국은행은?
미 연방준비제도(Fed)는 기업들의 유동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23일 ‘무제한 양적완화’까지 발표했다. 회사채 발행 및 매입 지원은 물론 학자금·자동차·신용카드 대출까지 ABS(자산유동화증권)로 묶어 매입해주는 기구도 신설키로 했다. 중앙은행이 최종대부자로서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태도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나라야나 코처라코타 전 미니애폴리스 연방은행 총재는 기업대출에 개입하는 것은 연준이 디폴트 위험을 안게 되므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우려할 정도다.
이에 비해 한국은행은 같은 날 보도참고자료를 내고 시장 일각에서 중앙은행 발권력을 동원해 회사채 등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시장 안정화에 나서야 한다는 요구를 일축했다. 한은법 68조를 들어 “유통성과 안전성 요건을 충족하기에 미흡한 회사채 및 CP(기업어음)를 공개시장 매매대상 증권으로 지정하는 것은 한은법 취지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국민의 부담이 되는 손실 위험을 떠안아서는 안되며 정부 보증없이 시행하기도 어렵다고 강조했다.
한은의 소극적 태도는 미 연준이 연준법 13조에 재무부 장관의 승인이 필요한 단서 조항이 있음에도 신규회사채 발행 및 대출지원을 위한 기구를 설치하기로 한 것과 차이가 있다. 대신 한은은 증권금융과 함께 정부가 24일 발표한 100조원 규모의 금융시장 안정화 방안 가운데 CP 등 단기자금안정을 위한 5조원 가량의 유동성을 공급하는 역할에 그쳤다. 중앙은행이 단순 국책은행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②정부는 채권·증시안정펀드로 생색내기
금융시장 안정화 방안 가운데 각각 20조원, 10조원 규모로 조성키로 한 채권시장안정펀드와 증시안정기금은 생색은 정부가 내고 부담은 금융기관에 지우는 구시대적 도구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 연준이 무제한 양적완화를 실시하며 기업 대출 걸림돌이 되는 손실흡수능력비율(TLAC)을 완화해 은행들이 대출시 자본금을 추가로 쌓지 않도록 배려한 것과도 비교된다.
국내 금융기관들은 선진국 수준에 비해 재무건전성이 취약한 상황에서 채권안정기금을 떠안은 형국이다. 3대금융 지주는 원리금 상환 비중이 낮아 대출채권 대비 충당금 적립 수준은 미국 상업은행의 절반인 0.5%에 불과하다. 한계 기업이 늘어나고 가계부채 위험이 급증함에도 정부, 은행 모두 구조조정을 뒤로 미룬 결과 충당금 적립률과 자본비율은 2년 전에 비해 각각 0.11%포인트, 1.2%포인트 하락했다. 손해율 증가에다 최근 0%대 기준금리 인하로 대규모 영업손실이 불가피한 보험사들도 이중부담을 안게 됐다.
키움증권은 “정부가 할 일은 금융회사의 자금 중개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며 “정책기조 전환 없이 희생만 강요하면 머지 않아 은행이 정부의 조력자가 되기보다는 위기의 주체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증권시장안정펀드도 추락하는 주식시장을 잠시 안정시키는 링거에 불과해 증권·자산운용사에 부담만 지울 뿐이라는 지적이다. 예전처럼 시스템 문제나 금융시장 유동성 환경에 문제가 있으면 증시안정기금 같은 정책이 효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코로나19 증가세가 실물경제에 충격을 주고 주가가 이를 반영하는 악순환 속에서 이 펀드가 주가를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지는 못한다.
627개사를 동원해 1990년 도입된 증안기금처럼 오히려 외국인투자자들로부터 인위적 주가조작 수단이라는 비난을 자초할 가능성이 높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