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멈춰 세운 한반도 외교 시계

입력 2020-03-24 17:58
북한, 개별관광·방역협력 제안 무응답
한·미, 한·중 현안도 코로나19 탓 지지부진
한·일 관계는 ‘시계 제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한반도 안팎의 외교적 움직임도 완전히 얼어붙었다. 우리 정부는 올해 들어 북·미 비핵화 협상의 진전을 기다리지 않고 남북관계에서부터 물꼬를 튼다는 구상을 세웠으나 코로나19 탓에 첫 발자국조차 내딛지 못했다. 남북은 물론 한·미, 한·중, 한·일 간에도 굵직한 현안이 산적해 있지만 각국이 코로나19 방역 등 국내 현안에 집중하느라 진전이 보이지 않는 상태다.

북한은 문재인 대통령의 개별관광 제안에 여전히 뚜렷한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북한이 거부 의사를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국경을 전면 봉쇄하고 있어 개별관광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우리 정부와 미국이 제안한 코로나19 방역 협력에도 북한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남북, 북·미 관계가 전환점을 맞을 것이라는 기대가 한때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불투명하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24일 “국제기구 여러 곳이 이미 북한에 코로나19 관련 물품을 전달하기로 한 상황”이라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대북 제재 등 난국에 대한) 정면 돌파를 선언한 북한이 코로나19를 이유로 남한과 협력에 나설 이유는 없어 보인다”고 분석했다. 홍 실장은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코로나19 방역 협력을 친서로 제안했지만 이 역시 북한이 받을 이유가 없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도 방역 협력과 관련해 답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미 간 현안인 방위비 분담금 협상도 코로나19의 여파를 맞았다. 양국 간 입장차가 극단적으로 큰 데다 코로나19로 협상단의 이동이 제약되면서 다음 회의 일정을 잡기도 어려워진 실정이다. 양국 대표단은 현재 전화와 이메일 등으로 소통하고 있으며 화상회의를 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은 “국제적 이동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회의가 개최될지 불투명하다”며 “유선 및 화상 등을 통해 긴밀히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국 대표단은 지난 17~19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두 달 만에 회의를 열었지만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양측이 두 달 동안 대면 회의 일정을 잡지 못했던 데는 한국 내 코로나19 확산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금액을 둘러싼 이견이 해소되지 않은데다 미국 내 코로나19 확산세가 커짐에 따라 다음 달 1일부터 주한미군 한국인 근로자 무급휴직 사태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중 관계는 정부 차원에서 마스크 등 방역 물품을 주고받으며 표면적으로는 다소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부 중국 지방정부가 한국발 여행객을 격리 조치한 것을 두고 한·중 관계의 한계를 노출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정부는 중국 눈치를 보는 저자세 외교를 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코로나19가 조기에 종식되지 않으면 한·중 최대 현안인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방한 일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수출규제 문제로 치고받았던 한·일 관계는 코로나19 때문에 더욱 얼어붙었다. 문 대통령은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미래지향적 관계를 언급하며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예고 없이 한국발 여행객의 입국을 제한하고 이에 우리 정부도 맞대응하면서 다시 갈등이 증폭됐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를 둘러싼 입장차 역시 전혀 좁혀지지 않아 배상금 지급을 위한 일본 전범기업 자산매각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특히 아베 정권은 각종 국내 정치적 스캔들에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도쿄올림픽 연기 논란까지 겹치면서 한·일 관계 개선에 의지를 보이기가 힘든 상태다. 아베 정권은 한국과 외교적 갈등을 벌여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려는 행태를 자주 보여 왔다. 한국 역시 4·15 총선을 앞두고 있어 한·일 관계에 신경 쓸 여력이 많지 않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일 관계는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양측의 근본적 입장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며 “양국이 직면한 현안이 너무 크기 때문에 관계 개선을 위한 계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성은 손재호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