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일태
장사가 되지 않았다. 날이 반소매 아니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더워야 할 텐데 선선했다. 그러니 냉차를 마실 사람이 없었다.
일태는 냉차 작은 리어커 냉차 온도를 점검하고 맥주 그라스를 씻은 뒤 멍하니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콘사이스 사전을 손에 들고 영어 단어를 외웠다. 혀를 움직여 발음도 해보았다. 여전히 손님은 없다.
한동안 그렇게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도 지치자 손님이 깜빡 놓고 간 신문을 펼쳐 읽었다.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서울로 드나들 수 있는 교통 대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사회면 귀퉁이에 짧게 실렸다.
일태도 어제 광주대단지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잠실을 거쳐 야산을 깎아 택지랍시고 조성해 놓은 광주대단지의 집에 가기란 지옥 길이였다. 만원 버스 안은 찜통이었고 사람들은 늘 악다구니였다. 막걸리 몇 순배 들이킨 이들은 그 좁은 버스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술주정을 했다.
일태는 사실 멀고 힘들어서 집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버스비를 아낄 겸 회현동 리어커 보관소에서 잤다. 리어커 틈새를 이리저리 움직이면 나름 아늑한 공간이 나왔는데 그 바닥에 폐자재 등으로 한기를 막으면 하룻밤쯤이야 지낼만했다. 추위 참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이날도 일태는 서둘러 리어커를 끌고 종로 YMCA 앞 인도로 향했다. 좋은 목을 차지하기 위해선 서둘러야 했다. 오늘도 건달들이 나타나지 않기를 속으로 기원했다.
그의 옷은 땟국물이 흘렀다. 흰 셔츠는 구겨진 데다 때가 타 볼썽사나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흘러 정오에 이를 무렵이었다.
한 남자가 라이카 카메라로 여기저기 찍었다. 선한 눈을 가진 40대 초반의 신사였다. 부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일태는 신문을 옆에 두고 눈을 마주쳤다.
“얼마입니까?”
억양이 이상한 물음이었다. 일태는 순간적으로 한국 사람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일태가 노 선생을 만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냉차 두 잔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한 잔을 내게 다시 내밀었다. 운수 좋은 날인가 싶었다.
일태가 서툰 영어로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자 일본인이라고 했다. 행상하는 그가 서툴지만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자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콘사이스를 외우고 있다고 하자 “오 그레이트!”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계속>
작가 전정희
저서로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한국의 성읍교회’ ‘아름다운 교회길’(이상 홍성사), ‘아름다운 전원교회’(크리스토), ‘TV에 반하다’(그린비) 등이 있다. 공저로 ‘민족주의자의 죽음’(학민사), ‘일본의 힘 교육에서 나온다’(청한)가 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