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일본인들이 모여 사는 본정4정목本町4丁目(현 충무로4가)에 고려청자를 취급하는 골동 상점이 생겼다. 주인은 일본인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다. 한국에서 생겨난 최초의 고려자기 골동품 가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를 두고 고미술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 대표를 지낸 사사키 초지는 “과감하게” 고려청자 상점을 열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힌 바 있다. 곤도 사고로가 기폭제가 돼 일본인들이 하나둘씩 고려청자 골동상점을 열기 시작했다.
식민지 시기 생겨난 고려청자 시장은 개항기에 서양인의 수요에 맞춰 1대 1 거래에 의존하던 음성적인 시장과는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구체적인 거래 장소가 생겨나기도 했고, 5~10년의 단기간에 급류처럼 탄생한 신시장이기도 했다. 고려청자는 기존에 방물점 수준의 한국인 골동상점에서는 상품으로서 취급하지 않던 신상품, 그것도 ‘노다지’ 상품이었다. 그 시장을 일본인이 장악했다.
백신 제조하다가 고려자기 상인으로 변신
최초로 서울에 고려자기 골동상점을 낸 일본인 곤도 사고로는 누구인가. 1913년 간행된 《재조선일본인실업가 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1897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백신 제조업에 종사했던 자였다. 도쿄의과대학 제일모범약국에서 일을 하다가 1892년 부산공립병원 약국장이 되었고, 1897년 서울에서 와서 종두용 백신 제조에 나섰지만, 그 사업에 실패했다. 이후 골동품에 취미를 갖게 되어 골동품 거래를 업으로 삼게 된 인물이다. 말하자면 그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인의 이민이 증가하던 시기에 한국으로 건너온 사람이다. 처음엔 일본에서 자신이 하던 백신제조업으로 돈을 벌어 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던 중 고려청자 거래에 눈을 뜬 것이다.
곤도가 고려상점을 낸 것이 왜 ‘과감한’ 행위였을까. 을사늑약으로 한국인 일본인 세상이 됐지만, 도굴품을 거래하는 일은 여전히 ‘불법’이었다. 그래서 개성에서 도굴된 고려자기의 경매도 야간에 이뤄지는 상황이었는데, 곤도는 버젓이 일본인 거리인 충무로에 골동상점을 냈다. 이는 불법을 자행해도 거리낄 게 없다는 을사늑약 이후 조선에 사는 일본인의 변화된 ‘법 감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곤도는 경성에 차린 골동품 상점에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고객 삼아 중국 자기와 일본 자기를 팔면서 동시에 당시 인기가 치솟던 도굴품 고려자기에 손을 대 큰돈을 벌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야케(三宅長策)라는 변호사의 증언을 보자.
@“당시 곤도의 가게에는 주로 백고려白高麗라 불리는 중국의 건백建白, 여균呂均, 주니朱泥 같은 종류나, 일본의 말차기류가 놓여 있었는데, 고려의 발굴품이 나오면 진귀하기 때문에 곧 누군가가 가지고 가 버렸다. 이것에 맛을 들여 누군가가 부추긴 것인지, 그 후 가게에 놓이는 고려청자의 수가 날로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왕가박물관 최초의 도자기의 컬렉션은 1908년 9월 공식 개관하기 전인 1908년 1월 26일에 곤도 사고로로부터 구입한 물건들이었다. 국보로 지정된 〈청자상감국화모란무늬참외모양병(靑瓷象嵌牡丹菊花文瓜形甁)〉(국보 제114호)도 그가 납품한 것이었다.
일본 상인들이 한국 고려자기 시장 싹쓸이
일본인 골동품상의 위세는 한국 최초의 근대박물관인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납품 내용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디지털베이스화한 소장품 아카이브 중에서 ‘덕수품, 도자기’만 추출해 보았다.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은 해방 이후 ‘덕수품’이라는 유물명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것은 이왕가박물관이 존속했던 전 기간(1908~45)에 걸쳐 수집된 소장품(총 1만 1,114점) 가운데 도자기류 총 2,573점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도자기를 납품한 이는 129명이다. 놀랍게도 이 가운데 물량 기준 상위 20위는 모두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다. 또 상위 10위가 1,899점을 제공해 전체 공급 물량의 73.8퍼센트를 차지했다. 1위 시마오카 타마키치(島岡玉吉)와 2위 시라이시 마스히코(白石益彦) 등 최상위 2명이 전체의 37.7퍼센트에 달하는 압도적인 물량을 납품했다.
시마오카 타마키치(島岡玉吉), 시라이시 마스히코(白石益彦), 야나이 세이치로(矢內瀨一浪), 오다테 카메키치(大舘龜吉), 에구치 토라지로(江口虎次郞), 곤도 사고로…. 이왕가박물관 납품(물량 기준) 상위에 오르며 식민지 조선의 고미술시장을 이끈 일본인 골동상의 성격에 대해 파악해보자.
우선 골동상별 납품 내역을 보자.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납품 물량 1위를 기록한 시마오카 타마키치는 1916년 판매한 조선 도자인 〈분청사기인화문대발(粉靑沙器印花文大鉢)〉 350엔(원)이 납품 최고가였다. 물량에 비해 취급한 도자기 수준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2위 시라이시 마스히코는 조선 도자도 취급했지만 고려 도자와 중국 도자의 물량이 월등히 많았다. 특히 고려 도자는 일제 강점 초기인 1911년 8월 31일 그해 가장 비쌌던 〈청자투각칠보문향로〉를 1,200엔에 납품한 것을 비롯해 주자, 매병, 침(베개) 등 100엔 이상 고가를 가장 많이 판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2~10엔짜리의 저가의 접시, 대접, 병류도 대거 공급하는 등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초기부터 납품 시장을 장악한 거물로 보인다.
3위 야나이 세이치로는 1908년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650엔에 납품하는 등 고려 도자를 가장 많이 납품했다. 1908년 중국 도자 〈백유흑화문잔(白釉黑畵花文盞)〉(40엔), 조선 도자 〈분청사기상감국류문매병(粉靑沙器象嵌菊柳文梅甁)〉(100엔)을 납품하는 등 중국 도자와 조선 도자도 함께 취급했는데, 특히 〈분청사기상감국류문매병〉은 그해 조선 도자 최고 구입가였다.
4위 에구치 토라지로는 1911년 고려의 〈청자상감당초문과형병〉을 550엔에 납품하는 등 고려 도자 비중이 높기는 했지만, 조선 도자와 중국 도자도 고르게 취급했다. 중국 도자로는 1912년 송나라 〈백자향로〉(200엔)가 눈에 띈다.
각각 5위, 10위에 오른 오다테 카메키치(大舘龜吉)/오? 카메키치(大?龜吉)는 동일인으로 보이는데, 1909년 조선의 〈백자절연기(白磁絶緣器)〉(80엔)를 파는 등 조선 도자만 취급해 이 분야에 특화한 인물 같다. 도쿄에서 정원과 관련 일을 하다가 코미야 차관과의 인연으로 조선에 건너 와 이왕가박물관 창경원의 정원 조성 일을 하고 공중목욕탕도 운영하다가 조선 도자 골동상으로 변신한 ‘오다테大舘’란 성씨를 가진 인물 이야기가 사사키의 회고록에 나온다.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수집 목록에 나오는 조선 도자 전문 골동상 오다테 카메키치가 그 ‘정원사 오다테’가 아닌가 추정이 된다.
7위에 오른 곤도 사고로는 전체 납품 물량은 100점에 그치지만 뛰어난 감식안을 보여주는 고미술품을 공급했다. 1908년 1월 26일 납품한 총 13점 가운데는 〈청자상감포도동자문주자승반〉(950엔)〈철채백상감연당초문화병鐵彩白象嵌蓮唐草文花甁〉(600엔) 등 초고가 자기가 포함되어 있다. 중국 도자와 조선 도자도 상당량 납품했다.
이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 골동품상이, 그것도 10여 명이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납품 시장을 과점했음을 알 수 있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들이 보인 정복자적인 태도로 미뤄, 고려자기든 조선백자든 이왕가박물관의 납품 시장을 일본인 골동상이 독점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에서 배운 학습효과…한국 고려자기 시장 선점
일본인 상인들이 선제적으로 이 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 일본에서 먼저 동양 도자 열풍을 경험한 ‘학습효과’가 작용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서양인들의 동양 취미에 따른 도자기 수집 바람이 1870~1880년대부터 불어 닥쳤다. 이 무렵에는 이미 일본 자기를 비롯한 중국 수입 자기가 고가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현지에서의 학습효과를 통해 고려자기의 상품 가치를 먼저 알아본 일본인 골동품상에 의해 고려자기를 취급하는 점포를 차린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도자기 골동품상을 시작한 일본인 상인들은 이 나라에서 거래의 싹이 트기 시작한 고려청자가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값이 올라 미래에는 차익 실현이 가능한 투자성 높은 상품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일본인들이 고려자기의 ‘상품 가능성’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전쟁 당시 일본군 주둔지였던 개성 일대에 잔류했던 일본군에 의해 고려 고분이 파헤쳐졌고 고려청자를 비롯한 각종 유물이 도굴돼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그런데 고분 훼손에 가담했던 일본군 중에는 본국으로 귀환한 이후 고려청자의 도굴에 목적을 두고 1900~1905년 일본인 수집가와 상인을 대동하고 재입국한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일제 강점기 최대 고미술품 경매회사인 경성미술구락부 상무를 지낸 모리 이시치로(毛利猪七郞)는 군인 출신으로 러일전쟁 당시 개성 방면의 수비를 담당했었고, 개성 방면에서 출토되는 고려자기의 가치를 알아보고 퇴역 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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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미술거리를 걷다]를 사랑해준 독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시리즈는 아쉽게도 여기서 마칩니다. 기사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곧 출간될 저서 ≪미술시장의 탄생≫(도서출판 푸른역사)에 담았습니다. 화랑의 전신 ‘서화관’, 고려청자의 ‘대체재’ 조선백자, ‘경성의 크리스티’ 경성미술구락부, 서양화 전시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미술품 투자의 대상이 되다, 근대적 화랑 ‘백화점 갤러리’의 등장 등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미술시장의 탄생≫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