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규의 히든 히어로] 그가 남긴 단서, 죄수번호 ‘1679’

입력 2020-03-21 08:00
신현표 선생의 후손(왼쪽)과 촬영한 사진.

어느 한의사의 독립운동 자료를 찾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자료를 찾을 수 없을 때 우리는 현지를 찾아가야 한다.

중국 조선인 자치지역인 연길 대전자령 라자구 지역에서 매서운 칼바람을 이겨내며 전투 지역을 찾아가 보고,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공문서 사료관·방위성에서 100년 전 장백현 지역 일본 헌병 자료와 요시찰인물 명부 등 수많은 자료를 뒤적였다.

처음에는 독립운동가로 자료를 찾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독립운동가라 부르지만, 일제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불령선인, 요시찰인물, 반일세력’ 등으로 불렀다.

외교사료관과 방위성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역사 교수가 필자가 어떤 이유로 와있는지를 듣고는 한마음이 되어 함께 자료를 찾던 기억은 다시 생각해봐도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주어진 출장 시간이 부족해 여러 번 일본을 가야만 했고 그렇게 찾고 찾다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벽에 막혀 괴로워했던 시간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간다.

신현표 선생.

신현표는 1903년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면 동상리에서 신영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9살 때 이숙(작은아버지) 신홍균이 가족을 이끌고 북청을 떠나 압록강을 건너, 봉천성 장백현 17도구로 이주했다. 18세에 중국 지방 북간도 용정시 동흥중학교에 입학했다. 동흥중학교는 1912년 동학 교주였던 손병희가 세운 학교다. 그 뒤 동흥중학교는 은진중학, 명신여중, 광명중학, 대성중학, 광명여중 등과 하나로 합쳐져 용정중학교가 됐다. 이때가 1920년도인데, 북간도에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일어난 시기다. 북간도 지역 중소규모의 독립군들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독군부에 편입되어 힘을 보탰다.

신현표는 22세에 동흥중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제일 정몽학교 훈도로 재임했다. 정몽학교는 1913년 11월 유일우(劉一憂)가 중국 길림성 장백현에 설립하였는데 단어 그대로 장백현 한인사회를 하나로 묶어 바르게 깨우친다는 뜻이다. 이곳에서는 학생들에게 철저한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했고, 교사와 학생들은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했으며, 독립운동가도 많이 배출됐다.

그런데 신현표가 재직할 당시 정몽학교는 장백현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 ‘광정단’의 간부 출신인 오주환(吳周煥)이 1925년 제일정몽학교 교장을 맡는 등 독립군 단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때였다. 광정단은 1922년 만주에서 대한국민단·대진단·대한독립군비단·흥업단 등의 독립군 단체가 통합 발전한 독립군단으로, 이후 ‘정의부’로 통합됐다. 당시 신현표가 어떤 이유에서 정몽학교 교사로 활동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남겨진 자료는 없다. 그러나 이 학교 교사들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였고 신현표는 그곳에 연고가 없었다. 이것은 분명 어떤 메시지를 전해준다. 기록이 없다고 독립운동이 없던 것은 아니다.

신현표는 정몽학교에서 교사로 1년여 동안 근무한 뒤 1926년 함경남도 갑산군 혜산현읍에서 호적 서기로 일했다. 당시 그는 본적을 북청에서 갑산으로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적 서기를 그만뒀다. 고향인 북청으로 돌아와서는 1929년까지 가업이었던 한의업을 배우고 한의사가 되어 마을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그의 유서에 나와 있듯이 그는 이동하는 지역마다 그 지역에 사는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치료해주고 상당 기간 무료로 진료도 해주는 등 그때부터 ‘의술이 아닌 인술’을 베풀라는 그의 평생의 의료철학이자 입버릇처럼 말했던 좌우명을 실천했다.

그 뒤 신현표의 행방은 놀라운 사건으로 드러났다. 1930년 3월 제3차 조선공산당 만주총국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자료가 발견됐다. 역사학계에서는 이를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1~3차 간도공산당 사건을 독립운동 관련 집회의 성격으로 보고 있고 4차부터는 ‘공산당원집회’의 성격으로 본다. 그때의 이명인 ‘신호’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도 언급된 적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신현표와 나이가 같았고 호적서기로 갑산면에 재직했다는 심문조서 본적 기록이 확인됐다. 위에서 말했던 바로 그 자료를 통해 우리가 찾던 ‘이 인물’이 ‘저 인물’임을 찾아낸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이 하늘에서 툭 등장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 그러나 ‘신호=신현표’라고 가정하자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풀렸다. 이런 경우 이 둘을 동일인물로 판단한다.

일제 기마병 10여명이 조계지 철조망 밖에서 호각을 불어대면서 집회 시위 중인 학생들을 향해 해산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보는 체, 마는 체하면서 계속하여 구호를 외치고 일제의 만행을 목이 터질 듯 외쳤다. 일제 기마병들이 계속하여 호각을 불면서 야단치자 학생들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경찰들에게 항변했다. 분노한 학생들은 참을 수 없어 철조망을 뛰쳐나가 기마병들을 덮쳤다. 학생들은 기마병들을 말에서 끌어 내려 엎드려놓고 반 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팼으며 이들의 군도를 빼앗아 끊어놓고 옷과 모자를 찢어놓았다. 이것은 연변에서 처음으로 학생들이 무장한 일본 경찰들과 맞서 격투를 벌인 반일 행동이었다. 이것이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의 핵심내용이다. 신현표는 4월 21일 오후 3시경 혜산진에서 혜산진경찰서 경찰에 검거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았고, 그 내용을 ‘중외일보’ 1930년 4월 26일 자 신문기사에서 찾아냈다.

신현표 선생의 묘소를 그의 후손과 함께 방문했다.

그해 이 사건과 관련하여 5월 중순까지 13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이들 가운데 신현표 등 69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으로 호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때 신현표는 자신이 부여받은 죄수 번호 ‘1679’로 옥고를 치렀다. 신현표의 장남 신준식씨는 선친이 평소 옆구리에 난 긴 칼자국을 보여주었던 것, 당시 말을 탄 기마 경찰이 자신에게 달려와 총칼로 벤 자국이라고 말해주었던 것, 자신의 죄수번호 ‘1679’를 일본어 발음 ‘센로쿠 하큐 나나 쥬 큐’로 이야기하던 것을 기억해냈다. 매우 많은 시간이 지났어도 신씨는 ‘1679’보다 ‘센로쿠 하큐 나나 쥬 큐’를 먼저 기억해내며 눈시울을 붉혔다. 흩어져있는 독립운동 역사의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신문 자료에는 27세의 ‘신호(申琥)’라는 이름이 나온다. 신현표는 당시 1903년생으로 27살이었고 호적서기로 근무하였던 ‘갑산’ 출신으로 되어 있는 것이 동일했다. 더욱이 신현표가 작성한 ‘월남유서’(1959)에 자신의 죄수번호를 밝힌 것을 통해 동일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69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 4개월 동안 경찰과 검사의 취조를 받았다.담당 검사는 모리우라 쿠마조우(森浦熊藏)였다. 그는 1908년 대구지방법원 검사로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후 한 말 시기 의병을 심문하고,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지방법원 검사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취조한 공안 담당 검사였다. 많은 사람이 재판에 넘겨졌지만, 신현표 등 20명은 검사의 불기소 처분을 받아 1930년 8월 1일 오후 6시경에 석방되었다. 그저 옆구리에 30cm가 넘는 칼에 맞은 자상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석방된 뒤에 고향인 북청으로 돌아와 1932년까지 한의업에 종사하다가, 그해 7월 통화현 임강현으로 이주했다. 그 뒤 양의사시험에 합격하여 만주의사허가증을 취득했다. 양방과 한방의 의사 자격 2가지를 모두 취득한 그는 6도구 지역에 사립 ‘광생의원’을 개업하여 1941년까지 지역 사람들을 치료했다. 1942년 잠시 다시 북청으로 내려와 있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대전자령 전투의 숨은 영웅이자 작은아버지인 신홍균이 거주하던 목단강성 동구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 후 신현표는 해방 직후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1946년에 조직한 정치공작대 대원으로 활동하였고 1947년 대한민국에서 한의업을 개업한 뒤 1981년 작고할 때까지 의료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역사에서 잊히고 온전히 평가받지 못했던 독립운동의 숨은 기록들을 밝히며, 독립운동의 기록은 단순히 한 집안의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알아야 할 자랑스럽고 고결한 공공의 역사임을, 우리가 그런 역사의 후손인 것을 모두가 기억하고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정상규 작가는 다양한 역사 콘텐츠를 통해 숨겨진 위인을 발굴해왔다. 현재 ‘국가유공자 지원 시민단체 포윅스’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독립운동 맞습니다’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