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위기는 기본으로 돌아가게 한다 : 소명(calling) 편

입력 2020-03-20 11:06 수정 2020-03-20 11:10

박계문 목사
전 이랜드 사목
캐나다 트리니티 웨스턴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ty) 박사(D.min.) 과정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1~2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위기에는 항상 나를 찾는 것이 본능입니다. 살아야 하니까요? 과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이틀 전 코스코에 갔다가 줄이 한 2킬로는 서있습니다. 선착순 화장지 매입 line 였습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한 팩을 샀습니다. 긴박하니까요. 누가 알려 준 것도 아닌데, 본능적입니다.

한국 사회같이 집단 체제가 강한 나라에서는 나를 드러내는 순간 어느 문화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소외를 당합니다. 그만큼 집단 문화가 강했습니다. 특별히 군대 문화가 어느 조직이든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사수 부사수라는 군대 용어까지 쓰이기도 합니다. 현장의 긴박감을 위해서는 사용한다지만 실제로는 긍정보다는 부작용이 더 많은 용어입니다.

특별히 직장의 술 문화는 가히 원맨 쇼에 가깝다고 합니다. 1, 2, 3차까지 가면 남자들 세계에서는 다 압니다. 1차로는 밥 술입니다. 2차로 노래방가서 자신의 주특기를 살리기 위해서 노래 한 곡씩을 주무기로 연습합니다. 노래만 하면 안됩니다. 가무를 연습해야 합니다. 자신이 없으면 그 가무에 몸 개그를 집어 넣습니다.

이랜드에 있을 때 여의도 호텔에서 직원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여전에 함께 한 청년이 모 그룹 사 과장으로 있어서 위에 있는 임원이 오늘 회식인데 자리 예약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호텔에 저녁을 먹고 포도 주를 예약을 하고 보고를 했더니, 아뿔싸 그 임원 하는 말이, “너나 가서 호텔에서 밥 먹어라” 그리고 다시 식당과 술집을 예약했답니다.

정치권에서도 폭탄주는 유명합니다. 예전에 저는 목회자이게 누구를 만나도 주눅이 들지 않는 편입니다만, 어느 분(이름을 밝힐 수 없음)이 한번 식사하자고 비서를 통해서 연락이 와서 갔었습니다.

식사 후에 몇명이 더 합석을 해서 폭탄주 먹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소주에 맥주를 썩어서 한 잔씩 따라 주고, 먹고 그 분은 20잔 먹었는데 놀랐습니다. 술을 따르고 먹는 순간에 혈맹이 된 듯하였습니다. 저 먹었냐고요? 저는 안 먹었습니다. 나 중에 알았지만, 대한민국 VIP의 술 상무(?) 이셨습니다.

집단이라는 용어가 그룹(group, community)이라는 말보다는 식민지적인 집단(colony)의 형태에 가까운 용어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말도 안 되는 폐단과 부작용이 지금 대한 민국에 흐르는 사회 현상입니다.

개체가 없습니다. 내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본능으로 돌아 갔습니다. 내가 살아야 합니다. 가족이 살아야 합니다.

요즘 재택 근무가 일반화되어서 직장인들이 집에서 근무를 한답니다. 그래서 다시 유행하는 말이 있습니다. 삼시 세끼를 먹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요즘 삼식이 새끼로 전락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자유로움이 없이 남편 밥만 해주어야 하니까요. 생긴 용어입니다.

사회가 그렇다면, 그 동안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솔직히 아마도 집단의 폐단 현상이 가장 많은 곳이 교회입니다.(거룩하게 말을 숨겨야 하나요?) 규모가 있는 교회는 교구 별 부목사들이 교구를 관리합니다.

교구 관리의 핵심은 예배 동원(Mobilization) 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 평가가 예배 참여에 의해서 평가가 됩니다. 영적으로 간절히 사모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보다는, 동원하는데 익숙합니다.

자신은 참여 해주는데 기여하는 사람으로 타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자기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비 신앙을 추구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하는 일이 영적인 일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꼭 아닙니다. 교회에서 활동하는 봉사가 축복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곡 아닙니다. 세상의 일은 험난한 고통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지장의 일이 축복입니다.

직분자가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은 무엇 때문에 하는지요? 축복이 쌓이기 때문에 그럼 세상에서 돈 버는 것은 영적인 일이 아닌지요? 후자가 더 영적인 일이 아닌지요?

세상에서 이기는 방법을 익혀야 하는데 교회의 봉사와 교회의 규범에만 집중했습니다. 관심도 없고, 경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평신도들이 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얼마나 성도들이 가 진 모욕을 당하고 주님께 드리는 아픔을 들어 보셨나요?

그러나, 신앙은 집단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해결이 안으면 빚 좋은 개살구 신앙입니다. 겉만 멀쩡하고 영혼은 이미 자신은 천국 갈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을 지옥으로 가게 하는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축복의 바이러스가 아니라, 부작용의 바이러스를 달고 다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위기에서 영적으로 두 가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바로 우선 일 차적인 소명(calling) 입니다.

소명은 1차적 소명과 2차 적인 소명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1절에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called to be”)은 1차적 소명입니다. 2절의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called to do)은 2차적인 소명입니다.

오늘은 존재의 가치로서, 존재로서의 부르심 ‘called to be’를 나누고자 합니다.

1차적인 소명은 1절에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called to be)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영생에 대한 물음입니다. 존재로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사사기 6장에 기드온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미디안 군대를 피해서 밭에서 줍는 것도 금지된 상황에서 밀을 줍고, 바위 틈에서 숨어 밀을 파하는 기계가 아닌 포도 주 즙을 짜는 기계로 속이고 밀을 가루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불법이기에 걸리면 죽음입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엉뚱한 첫 마디를 합니다. “ 큰 용사여” 합니다.

지금 용사가요? 죽는냐 사는냐 하는 판에 가족의 생계에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그 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출애굽기 3장에 모세도 호렙 산으로 이끌리어 혼자 있게 하고 하나님의 사자가 가시나무 사이 불꽃으로 나타납니다. 모세가 장인 양이나 치고 있을 때 무슨 소망이 있었나요? 그 때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이사야 6장에도 이사야 선지자는 망하게 되었다 하며 성전으로 올라갔을 때 스랍 이라는 하나님의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다들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골방에서 기도 할 깨 은밀히 갚으시는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지금 내 존재에 대한 본능을 느낄 것입니다. 이 본능은 위기에서 생깁니다.

1차적인 소명과 관련하여, 이 말씀을 살 펴 보면 믿음은 “집단”(group)에서 출발하지 않고 “나”(self)라는 개체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해결점입니다.

그동안 사회적인 불안전한 심리적인 거리가 너무 밀착되어서 불편하고 집단에 폐가 안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 분리되고 격리되어 폐쇄(shut down) 되었습니다. 캐나다도 미국의 국경을 다 폐쇄 할 정도입니다. 비행기도 차량 이동도 불가 합니다.

자기가 있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크리스천은 무엇을 해야 할 까요? 지금 허탈과 미래의 불안이 나를 감쌀 수도 있지만, 우리의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긴박하게 나를 찾는 것입니다.

나를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땀방울이 빗방울이 되는 고통의 절박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역대 하 7장 14절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 기회를 통해 한국 교회가 운영되는 것도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영적으로 느슨하고 배부른 이전투구에서 벗어나 싸워야 합니다. 이제는 신앙은 한 사람의 소중 성과 영혼의 가치를 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계급주의적인 신앙 위화감에서 벗어야 합니다.

직장은 생존을 위해서 항상 긴장하고 있지만, 교회는 그 긴장감을 영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은 다 똑 같이 긴박감에 현실이 바뀌고 있습니다. 엄청난 파고가 닥 칠 것입니다.

교회를 조직화(organization) 하지 말고, 생명체인 성령이 활동하시는 유기체로 (organism)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 사회적인 격리 현상에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고 싶어 하십니다. 99마리 양보다 잃어 버린 양을 찾아 나가듯이 하나님은 전혀 경영 방법에 의해서 양을 치지 않으시고 한 마리의 이탈한 양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과의 “Soul talking”이 사라진 시대에 교회도 성장과 운영과 헌금에만 집중하지 말고, 목회자들이여 좋은 세단 차만 3년 마다 바꾸지 말고,

집단 강요가 마치 영적인 천국으로 보내는 지름길이라 여기지 말고, 자기 설교가 최고라고 교만과 하나님의 대언 자로 자처하지 말고,

제발 교인들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영적인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너무 바빠서 설교 할 시간이 없어 너무 남이 것 카피하지 말고……

나와 하나님의 사이에서의 간극을 좁혀, 이방 모압 여인 롯 처럼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께 딱 붙어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딱, 아교로 부쳐 놓은 것처럼 있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비행기 난 기류를 만날 때 간곡히 급히 기도한 것처럼 살려 달고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이 승부수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신비롭게 만들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