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절 투자적격 BBB 기업의 20% ‘추락한 천사’ 우려
다급해진 한국 정부도 금융기관 동원해 채권안정펀드 조성
버냉키-옐런 전 미 연준의장 “연준, 회사채 인수나서라”
신종 코로나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영업난에 봉착한 기업들의 회사채 부실이 글로벌 금융시장에 뇌관으로 떠올랐다. 그동안 10년이상 유지돼온 저금리 덕에 빚을 늘린 기업들이 코로나19를 계기로 맨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용등급이 높은 기업들조차 덩달아 회사채 발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업의 자금조달 시장이 붕괴 직전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가 단기에 안정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크레딧 시장 불안고조 → 신용경색 → 경기침체로 번질 소지가 있다.
우리 정부가 19일 1차 비상경제회의에서 채권시장안정펀드를 조성키로 한 것을 비롯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 등이 잇따라 채권 인수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 것도 경제의 근간인 기업의 신용이 무너질 경우 경기침체를 딛고 일어나기 어렵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19일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미국의 125개 투자적격등급(IG) 회사채의 부도위험 즉, 평균 CDS(신용부도스왑)를 나타내는 CDX IG지수는 최근 3주만에 0.78%포인트 급등했다. 투기등급(HY)인 CDX HY지수는 무려 3.51%포인트 확대됐다. 5년물 CDX HY는 지난달 21일 2.94%포인트에서 지난 17일 6.51%로 폭등했다. 올해 평균 2.86%포인트의 2배가 넘는 상승세다.
시장이 큰 폭으로 출렁이면서 적정가격(금리)을 찾기 힘든 상황으로 변해 유동성이 비교적 좋은 만기 5년 이하 투자적격 회사채에도 매수와 매도 호가의 차이가 1.20%포인트 까지 벌어졌다.
미 백화점 체인 메이시의 34년만기 채권(신용등급 Baa3)의 호가 차이는 3.03%포인트나 됐다. 정크본드는 매수자들이 인수를 꺼리면서 호가마저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센터는 전했다.
최근 23 거래일 가운데 11일 동안 미 회사채 발행 창구가 닫히면서 중장기 채권을 통한 조달 건수는 제로를 기록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14일 연속으로 발행 창구가 닫힌 이래 처음으로 높은 금리를 불러도 회사채를 발행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국내 회사채 시장도 심각해지고 있다. AA등급인 하나은행은 지난 13일 후순위 채권 수요예측을 실시했으나 3000억원 모집에 참가금액이 2700억원으로 미달했다. AA- 등급인 포스코 자회사 포스파워는 지난 17일 3년 만기 회사채 500억원 어치를 발행하기 위해 기관투자자를 상대로 진행한 수요예측에서 400억원만 매수 신청이 들어왔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주(3월 9∼13일) 회사채 발행액은 1조4245억원으로 전주(2∼6일)의 1조7558억원보다 3313억원 줄었다. 2월 마지막 주(24∼28일) 회사채 발행액 4조2244억원과 비교하면 3월 들어 절반 이하로 감소한 셈이다.
미국 기업들은 단기 자금이라도 확보하기위해 은행의 CP시장과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인 크레딧 라인(대출창구)으로 몰리면서 유동성이 더 심화되는 악순환이 전개되고 있다.
회사채 시장 경색은 코로나19와 유가하락 등에 의해 촉발된 금융시장 불안으로 저금리 분위기에서 과잉차입을 해온 기업의 위험성이 재조명되면서 신용등급 강등 및 디폴트 가능성이 부각됐기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지난해말 현재 글로벌 회사채 발행잔액은 13조5000억 달러로 금융위기 후인 2008~2019년 연평균 1조8000억 달러씩 발행돼 금융위기 전인 2000~2007년 연평균 8790억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특히 지난해에는 미 연준의 금리인하와 주요국의 양적완화(QE) 재개로 2조1000억원까지 증가하며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회사채 발행이 불어나면서 신용의 질이 나빠지고 가격의 금리 민감도가 커져 실물경기 둔화시 투자자 투매로 이어지기 쉬운 구조로 변했다. 투기등급 발행비중이 2010~2017년 20%를 상회했으며, 2018년 소폭 하회한 후 지난해에는 다시 25.2%로 올라가 1980년 이후 최장기간 높은 비중을 유지했다. 발행잔액으로 보면 2019년말 현재 투기등급 비중이 44%나 된다. A등급 이상 선진국 채권은 총 잔액의 30%에 불과하다.
더욱 문제는 투자적격 등급 최종 하단의 BBB 회사채가 위기가 발생하면서 등급 강등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BBB 회사채 비중은 연간 평균 38.9%에서 44.6%로, 지난해에만 51%(3조8000억달러)로 불어났다. 채권시장에서는 이를 ‘추락한 천사(Fallen Angel)’로 통칭하는데 발행 당시에는 투자적격 등급(IG)을 부여받은 채권이 시일이 지나 투기등급(HY)으로 신용등급이 강등되는 경우를 말한다. 금융위기 직후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의 연간 투기등급 강등 비율인 6.8%를 적용할 경우 2611억달러 규모의 BBB 채권이 투기등급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 구겐하임 파트너스의 스콧 미너드는 금융전문지 마켓워치에 미국 시장의 경우 BBB 회사채의 20% 가량(6600억달러 상당)이 투기등급으로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추산했다.
신평사들이 경기확장기에는 신용등급을 후하게 줬다가 경기침체기에 급격하게 하향조정하는 것도 회사채 시장을 억누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국제금융센터 김윤경 전문위원은 “최근 신용경색은 펀더멘탈이 의심되는 기업들이 저금리로 차입해 자사주 매입 등을 하며 주가를 부양해 온 행태가 현금흐름의 갑작스런 중지로 거품이 붕괴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와 관련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전임자인 벤 버냉키, 재닛 앨런 전 의장이 18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회사채 시장 안정 방안과 관련 조언을 아끼지 않는 공동 기고문을 게재해 정책으로 연결될지 여부가 관심이다. 두 사람은 최근 연준의 제로금리 채택과 양적완화 방안으로는 부족하다며 기업 신용을 부축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설령 코로나19 사태가 종료돼 일상으로 돌아간다해도 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파산할 경우 경기침체를 되돌리는 데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 재무장관은 이번 사태로 정부 개입이 없을 경우 미국 실업률이 20%로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따라서 두 전임 의장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영구적인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살아날 수 있는 기업들을 위해 신용을 부축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이를 위해 기간옥션대출(TAF·Term Auction Facility)을 재가동해 국채를 담보로 현금을 빌려주는 방안이나 양적완화 기준을 완화해 유럽처럼 회사채를 인수하는 방안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우리 정부의 채권시장안정펀드는 국책은행을 비롯해 시중은행 증권사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금융기관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금융위기 당시에는 10조원 규모로 조성됐으며 신용등급 BBB+ 이상의 회사채뿐 아니라 금융채, 프라이머리담보부채권(P-CBO), 여전채, 할부채 등도 인수대상에 포함됐다.
유럽중앙은행(ECB)이 18일 긴급 발표를 통해 7500억 유로를 투입키로 한 팬데믹비상매입프로그램(PEPP)도 유로국가들의 국채뿐 아니라 기업들의 회사채를 인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한 새로운 계획이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