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의 펀드 환매 중단 사태를 낳은 라임자산운용의 자금이 여러 기업의 ‘사냥’에 동원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기업이 발행한 전환사채(CB)를 라임이 사들이면 해당 기업이 이 자금으로 또다른 기업을 인수합병(M&A)하는 식의 속칭 기업사냥 양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가를 띄운 뒤 보유주식을 처분, 막대한 이익을 올리는 작전 행위가 벌어졌다는 의혹도 있다.
검찰은 라임 사태의 본질을 민생 다중피해 금융범죄로 보지만, 무자본 M&A 등 자본시장범죄에 대한 수사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라임의 투자 기업들에서는 횡령과 ‘전주’의 잠적이 잇따르고 있다.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남부지검 형사6부(부장검사 조상원)에는 금융감독원 인력들이 파견됐는데, 금융 당국에서는 “단순히 금융권의 불완전판매 수사를 돕는 건 아닐 것”이라고 본다.
라임 돈만 들어가면 쓰러진 기업들
19일 법조계와 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라임과 연관된 의심스런 자금흐름은 ‘에스모 투자’ 건이 대표적이다. 자동차 전장 생산업체인 에스모는 2017년 8월과 2018년 3월 428억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라임은 이 중 일부인 225억원어치를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사들였다. 에스모는 라임으로부터 조달한 자금 대부분을 디에이테크놀로지라는 2차전지 설비업체의 지분을 사들이는 데 쓴다.
기업을 위해 유무형 자산투자를 하는 대신 전환사채로 다른 기업의 지분을 확보하는 양상은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디에이테크놀로지 역시 6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해 ‘실탄’을 마련한 뒤 오아시스홀딩스로부터 전세버스 플랫폼 업체 위즈돔 주식을 사들였다. 자금의 기착지로 보이는 오아시스홀딩스는 다시 그 돈으로 디에이테크놀로지의 전환사채와 지분을 매수했다.
이 같은 ‘머니게임’은 주가 띄우기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라임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김정철 법무법인 우리 변호사는 “전환사채를 발행해 자금이 유입되면 증권시장의 호재가 되고 주가가 오르게 된다”며 “이때 보유한 주식을 팔아 막대한 이득을 남기는 전형적인 기업사냥이자 주가조작 사건의 형태”라고 지적했다.
내실은 어떨까. 라임이 손을 댄 기업들은 껍데기만 남은 한계기업으로 전락했다. 에스모의 경우 2019년 연결기준 505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순손실이 502억원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7000원을 넘던 에스모의 주가는 18일 현재 700원대로 추락해 있다. 오아시스홀딩스는 외부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조차 고개를 젓는 기업이 됐다. 오성회계법인은 지난해 3월 오아시스홀딩스 재무제표에 대해 감사의견 제시를 거절했다.
‘거래타당성 및 회계처리 적정성’ 등에서 불확실성이 문제가 된다는 이유였다. 김경율 회계사는 “감사의견 거절을 받은 기업은 금융거래 등 공적거래가 불가능해진다. 이처럼 강한 어조로 감사의견 거절이 나오는 것은 업계에서 매우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역시 라임의 돈이 투입됐던 게임회사 파티게임즈도 2018년 3월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의견 거절을 받고, 상장폐지 수순을 밟았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이런 라임의 비정상적 투자흐름에 대해 “라임의 돈이 사냥감이 된 기업으로 들어가고, 그 기업은 다시 전환사채 등을 일으켜 다른 기업을 인수합병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다시 라임펀드를 사주는 식으로 자금이 돌고 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영장 청구되면 도망치는 회장님들
라임-에스모의 비정상적인 거래를 주도한 인물로는 이모(53) 회장이 지목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출신인 이 회장은 주식시장에서 전문 기업사냥꾼으로도 통한다고 한다. 김 변호사는 “전면에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앞세워 일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장영준 전 대신증권 WM반포센터장과 라임 피해자의 녹취록에도 등장한다. 장 전 센터장은 이 회장을 에스모 주가하락의 원인 제공자로 설명하며 ‘X아치’라고 했다.
같은 녹취록에서 라임을 살릴 구세주처럼 언급된 김모(46) 회장 역시 기업사냥꾼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장 전 센터장은 김 회장이 재향군인회 상조회를 인수한 뒤 상조회 자금으로 라임의 일부 펀드를 매입할 계획을 알려주며 피해자를 안심시킨다. 실제 이 계획은 어느정도 실행되기도 했다. 김씨가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진 한 컨소시엄이 320억원에 상조회를 인수했고, 불과 2달만에 60억원의 웃돈을 받고 다른 상조회사에 매각했다. 이 기간 동안 상조회 계좌에서 현금 230억원이 인출됐는데, 돈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현재 김 회장은 라임 사태의 핵심 관계자인 이종필 전 라임 부사장처럼 수사당국의 감시망을 피해 도피 중이다. 그가 실질적으로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산업용 로봇 제조업체 스타모빌리티는 회사자금 517억원을 횡령했다며 김 회장을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했다. 김 회장은 지난해 1월 경기도 한 버스업체 자금 161억원을 업체 재무담당자와 공모해 횡령한 혐의로 경찰의 수사선상에도 올라 있다. 경기남부경찰청은 지난 1월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그는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지 않고 잠적했다. 경찰은 횡령 자금이 김 회장의 기업 인수합병에 활용됐을 가능성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정현수 나성원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