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건 자제와 겸손”

입력 2020-03-19 10:46
신작 ‘타인의 해석’을 발표한 말콤 글래드웰. 워싱턴포스트 뉴요커 등에서 활동했던 그는 세계 출판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논픽션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영사 제공

#1. 지구촌에 전쟁의 기운이 번지던 1930년대 세계사를 보면 수수께끼 같은 지점이 나온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야단법석을 떨던 때였는데, 그를 만나본 사람은 극소수였다. 미국 대통령도, 소련 지도자도 히틀러를 만난 적이 없었다. 한데 당시 히틀러를 마주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다. 그는 히틀러를 만난 뒤 영국 각료들에게 “(히틀러에게서) 광기의 신호는 전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왜 체임벌린은 오판을 했을까. 오히려 당시 히틀러의 정체를 간파한 이들은 그와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었다. 윈스턴 처칠이 대표적이다. 처칠은 히틀러가 “표리부동한 악한”이라고 확신했다.

#2. 미국 국방정보국에서 일한 한 여성이 있었다. 쿠바 문제에 정통해 “쿠바의 여왕”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여성은 취업할 때부터 쿠바의 스파이였다. 10년 넘게 정체를 숨기고 국방정보국에서 일했다. 그의 행적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지만 그 누구도 이 여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책상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헨리 5세’에 등장하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국왕은 그들의 계획을 전부 알아챘으나 그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겠지.” 돌이켜 보면 이것은 “쿠바의 여왕은 미국의 계획을 전부 알았으나 아무도 생각지 못하겠지”라는 조롱의 글이었다.

자, 그렇다면 이쯤에서 위의 두 사례가 던지는 질문을 정리해보자. 첫째, 왜 우리는 타인의 정체를 오판할 때가 많은가. 둘째, 낯선 이가 면전에서 늘어놓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타인의 해석’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드는 책으로 흥미로운 사례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책에서 제시하는 “오해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①진실 기본값 이론, ②투명성 가정의 실패, ③결합의 파괴. ①번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가 정직할 것이라는 예상을 ‘기본값’으로 두는 탓에 거짓말이나 꼬드김에 쉽게 넘어가는 걸 의미한다. ②번은 표정이나 언행에 마음이 투명하게 드러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편견을 가리킨다. ③번은 특정한 행동이나 말이 나온 ‘맥락’의 중요성을 많은 이가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들 ①~③번 탓에 진정한 소통은 난망해지고 오해가 생겨난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을 믿지 말라는 것인가. ‘타인의 해석’에 담긴 핵심 주장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은 대목을 옮기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 관해 최선의 가정을 하는 것은 현대사회를 만들어낸 속성이다. 타인을 신뢰하는 우리의 본성이 모독을 당하는 사태는 비극적이다. 하지만 그 대안, 즉 약탈과 기만에 맞서는 방어 수단으로 신뢰를 포기하는 것은 더 나쁘다. 또한 우리는 낯선 이를 해독하려는 우리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제와 겸손이다.”



어쩌면 싱거운 결론처럼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누구인지 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타인의 해석’은 세계 출판계의 슈퍼스타인 말콤 글래드웰의 책이다. 그는 중대한 전환점을 의미하는 단어 ‘티핑 포인트’를 유행시켰고, 성공한 사람들한테서 발견되는 ‘1만 시간의 법칙’을 퍼뜨렸다. 내놓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려놓는 그는 최고의 논픽션 작가로 불리고 있다.

저자의 실력은 신작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글래드웰은 전작들을 통해 독자에게 유명한 사건이나 실험을 새로운 차원에서 들여다보게 만들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가령 그는 심리학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을 다루면서, 실험 결과보다는 참가자들이 실험 의도에 의심을 품었지만 왜 속아 넘어갔는지를 분석한다). 다양한 학문을 넘나드는 박람강기한 재능, 이야기의 순서를 비틀어 독자를 감질나게 만드는 필력도 느낄 수 있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어판 감수를 맡은 글에서 “(이 책은)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진실일 것이다’라는 가정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역설을 설파한다”고 소개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