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 사태의 위험성을 경시하는 모습을 보였던 미국과 영국 정상이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연구 보고서 한 편에 대응 기조를 바꿨다는 해석이 나왔다.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은 17일(현지시간)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 연구진이 최근 내놓은 코로나19 전망 보고서를 조명했다. 과학적인 보고서 한 편이 코로나19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던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충격을 안기고 초강경 대응에 나서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그간 유럽 주요국들에 비해 코로나19에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11일까지만 해도 코로나19 진단검사는 직접 병원을 찾는 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감염 의심자나 접촉자들을 추적해 강제로 검사받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학교 휴업이나 스포츠 경기 등 대형행사 금지 조치도 주저했다. 성급하게 엄격한 조치를 취할 경우 국민들이 피로감을 느낄 것이라 판단한 탓이다. 영 정부의 수석과학보좌관은 BBC 인터뷰에서 국민 중 60~70%가 감염돼 저절로 집단면역이 생기길 바란다고 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전날 존슨 총리는 돌변했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모든 불필요한 접촉과 여행을 피하고 영화관과 펍을 가지 말라”며 “특히 70세 이상의 고령층과 임산부, 지병이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가족 중 감염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구성원은 14일 간 자가 격리를 하라고도 당부했다.
존슨 총리의 보좌관들은 미국 워싱턴포스트(WP)에 임페리얼칼리지런던 연구진의 보고서가 지난 주말 영 정부에 공유됐고 총리의 생각을 180도 돌려놓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보고서에는 미국과 영국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코로나19 확산을 통제하지 못할 경우 미국에선 220만명, 영국에선 51만명이 숨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실렸다. 각 정부가 코로나19 대응 조치를 점진적으로 강화할 경우에도 미국에선 110만~120만명, 영국에선 25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보고서는 지난 15일 미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에도 공유된 것으로 알려졌다. WP는 “해당 보고서가 트럼프 행정부의 방침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실제 코로나19를 독감 정도로 간주하며 여름이 되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보고서가 백악관에 전달된 다음날 전국민을 향해 “10명 이상의 모임을 피하라”라고 촉구했다. 트럼프가 내놓은 가이드라인에는 재택근무 및 쇼핑·외식 금지 등을 권고하는 강화된 수준의 생활 수칙이 다수 포함됐다.
데보라 벅스 백악관 코로나19 TF 조정관은 코로나 대응 기조가 왜 강화됐는지 묻는 기자들에게 ‘영국서 개발된 모델로부터 얻은 새 정보’를 언급했다. 영 연구진의 보고서를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CNN은 “영국 전염병학자들의 불길한 보고서가 미국과 영국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바꾸어 놓았다”고 전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