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위기는 기본으로 돌아가게 한다(예배 편)

입력 2020-03-18 10:44 수정 2020-03-18 11:45

박계문 목사
전 이랜드 사목
캐나다 트리니티 웨스턴대학교(Trinity Western Univerty) 박사(D.min.) 과정

본문: 요한복음 4장 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대유행(pandemic)을 통해 인간에게 많은 깨달음과 얼마나 인간이 나약한 존재인가 새삼 느낍니다.

균(Virus)은 세계 역사를 바꿔 놓기도 하고 찬란한 문명이 사라지게도 합니다.

중세 때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2분의 1 혹은 3분의 1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20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엄청난 고통을 인간이 당했습니다.

그 중세 암흑기에 주는 고통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인류의 새로운 역사의 변혁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콜롬버스 이전의 남아메리카의 지배 문명인 잉카문명도 결국은 천연두라는 전염병으로 역사에서 사라졌고 그 찬란한 흔적만 인간의 입에 감탄을 자아낼 뿐입니다.

21세기 최첨단의 기술과 의학이 발달했어도 전혀 이 균의 형체도 발견하지 못하고 허둥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전 세계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자구책을 내 놓고 최첨단 의학품, 의약기술을 내 놓아도 아무 진전이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e) 외에는 딱히 처방이 없는 상태입니다.

연일 미국의 다우지수와 나스닥은 급격한 하락으로 서킷 브레이크(일일 거래 7%이하 하락 할 때 일시 거래 중지)로 공포지수(VIX)가 전쟁 때 보다 더 높은 상태입니다.

미국은 양적 완화로 돈을 풀고(1조 달러 이상) 금리를 인하해 지금의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한국도 동일합니다.

그러나 해결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냥 이 무방비의 상태에서 기다릴 뿐입니다.

이 코로나19를 통해 얻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위기는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특별히 요즘 예배의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지금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급격한 변화에 대한 많은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한국은 행정명령까지 하는 기독교와 국가간의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난 주일 트럼프 대통령이 기도의 날로 선포해 모든 교회들이 기도하였습니다. 아주 한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 전개됐습니다.

한 나라는 교회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한 나라는 위기에서 교회를 신뢰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정치적인 맥락에서만 풀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이 위기에서 예배의 귀중성을 다시 회복하는 기회가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예배는 그 중심을 보시지 그 모임에 중점이 아닙니다. .

물론 온라인의 편의성에 의한 예배가 둔갑이 된다면 절대 안됩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교회 공동체는 온라인이 원칙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임이 있는 예배가 원칙입니다.

원칙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죄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러한 것은 상황일 뿐입니다. 우리는 너무 이분법적으로 생각합니다.

혹시 교회 직접 가서 예배 못 드려서 죄지은 양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진리) 우리는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 비상상황(extraordinary situation)에서 온라인은 우리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의 선용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디에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물론 중세에 흑사병이 창권 할 때도 모이는 예배는 마틴 루터나 칼빈도 강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역사적 사실인 다른 면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temple)은 이미 예수님께서 오시고 그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돌단을 쌓고 제단을 쌓은 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성전에 올라 예배를 못 드렸지만 이를 놓고 신학적으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예배의 유형은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예배를 이렇게 드려야 한다는 원칙과 순서도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 있는 예배의 모습(사도행전, 시편 등)을 참조해서 예배 순서를 만든 것입니다. 선한 전통입니다.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인과 유대인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고, 사마리아인은 ‘이 산’이라 지칭한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며, 서로가 자신들의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주장했습니다.

장소와 서로의 전통성을 놓고 논쟁과 멸시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상황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하셨지 어느 특정 장소에서 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에는 서로에게 필요한 편익과 안전을 위해 온라인 예배는 선택할 수 있는 처방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공동체 예배를 사수해야 합니다. 좋은 전통적인 예배는 받아드려야겠지만, 낡고 회진 옷은 버려야 합니다.

예배 사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신령성과 진정성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알곡과 쭉정이는 갈라지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도 많은 교회들이 경제난으로 쓰러지는 경우도 있지만, 진실과 거짓이 갈라지는 교회들이 수두룩 할 것입니다. 드러날 것입니다.

전정한 예배의 감격을 어디에서나 회복하시길 기도합니다.

교회는 교제가 아닙니다. 교회의 신앙공동체는 예배를 통한 성령이 역사하는 현장입니다. 최우선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