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①] “신혼 5개월 차, 아내 몰래 ‘청도 대남병원’ 지원서를 넣었다”

입력 2020-03-18 00:50 수정 2020-03-18 01:05
오성훈 간호사 제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밤낮없이 애쓰는 간호사들을 그린 단편 웹툰이 인스타그램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한 데 모인 간호사들이 서로 체온을 측정해주다 ‘37.6도’란 숫자를 보고 입을 틀어 막는 모습. 보호복을 입으며 ‘나 지금 떨고 있니? 지금 진정하게 생겼니?’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 의료용 마스크와 고글 때문에 헐어버린 얼굴 곳곳을 가린 일회용 반창고까지. 코로나 병동 풍경이 그대로 녹아있다.

이 그림을 그린 건 2년 차 오성훈(27) 간호사다. 지금은 병원을 나와 간호인들의 고충을 웹툰으로 그리고, 그들의 업무와 적응을 돕는 회사 ‘널스노트’를 창업해 ‘간호사를 간호하는 간호사’로 활동 중이다. 그러다 지난달 29일 코로나 사태 최전방인 대구·경북 의료 자원봉사를 떠났다. 오 간호사는 16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치열한 17일간의 기록을 전했다.

오성훈 간호사가 그린 웹툰 그림

신혼 5개월…아내 몰래 저지른 일

‘대구·경북 코로나 병동 의료진이 부족합니다.’

오 간호사는 2월 어느 날, 대한간호사협회의 호소문을 본 날을 기억한다. 아내에게 된통 혼이 난 날이라 잊을 수 없다. 의료 봉사를 다녀오고 싶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단호한 반대에 부딪혔다. 옆 사람 기침 소리에도 민감한 시국에, 코로나 사태 최전방으로 향하겠다는 남편을 누가 잡지 않을까. 더군다나 두 사람은 결혼한 지 5개월밖에 안 된 신혼부부였고 아내는 어린이집 교사였다. “이번 일에 단 하나라도 연결되면 안 된다”며 분노한 아내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틀이 지났다. 국내 하루 확진자가 1000명 단위로 늘어났다. 오 간호사는 “제가 못 참을 것 같더라”며 “나는 의료인인데, 현장에 가지 않으면서 어떻게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울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런 그의 가슴에 불쑥 솟아난 다짐은 “일단 (지원서를) 넣고 보자”였다. 완강히 반대하던 아내 몰래 저지른 일이다.

근무지 발령이 난 건 그로부터 3일 뒤인 지난달 28일이었다. 오후 9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협회 관계자는 “청도군으로 오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 간호사는 “처음 들어보는 동네였다. 처음에는 ‘아, 보건소를 가나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정확히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때부터 수화기 건너 목소리는 더듬대기 시작했다. 오 간호사가 가야 할 곳은 코로나19 집단 감염 사태가 발생한 ‘청도 대남병원’이었다. 그곳의 상황은 급박하다고 했다. 다음날 오후 1시까지 와달라는 부탁이 이어졌다.

오 간호사는 “말해주시는 분도 거절을 많이 당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목소리도 떨리고 더듬거리면서 미안해 하셨다”며 “청도 대남병원으로 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TV에서 본 뉴스들이 생각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겁이 났고 솔직히 망설여졌다”고 했다.

오성훈 간호사와 아내가 주고 받은 편지.

“재난 영화 세트장 같았다” 그곳의 첫인상

전화를 받고 두세 시간이 지나자 아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당장 내일 청도로 떠나야 한다고 말해야 했다. 오 간호사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속으로 끊임없이 고민했다. 일단 아내 손을 잡고 ‘의료 봉사 가게 됐다’고 고백했다”며 “그 순간 아내가 말을 잃더라. 다음날 출발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멘붕’에 빠졌다. 너무 미안했다”고 말했다.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아내는 떠나던 날 아침부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이야기해라” “면역식품을 챙겨 택배로 보내주겠다” “주소가 나오거든 바로 말하라”며 오 간호사의 진심을 이해했다.

지난달 29일. 아내가 싸준 영양제를 챙겨 들고 청도 대남병원에 도착했다. 그곳의 첫인상이 어땠냐고 묻자 오 간호사는 “영화 속 세트장 같았다”고 답했다. 첫날은 병원 내 근무 교육을 받은 뒤 상황을 전달 들었다. 그리고 투입 전 마지막 휴식을 위해 식당을 찾아 나섰다. 10분을 걷고 20분을 걸었지만 오 간호사와 동료 의료진들은 ‘열려있는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편의점 외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더라. 물론 거리에도 사람이 없었다”며 “사람 사는 곳이 맞는지, 음산하고 고립된 분위기였다. 우울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고 했다.

이튿날 본격적으로 업무에 투입되고 나서도 이런 인상은 지울 수 없었다. 곳곳에 붙은 ‘출입금지’ 안내 문구와 어두운 표정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오 간호사는 “청도 대남병원 환자들은 대부분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복도에 마음대로 누워있기도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분들도 있었다”며 “모든 직원과 의료진이 떡진 머리로 버티고 있었다”고 했다.

청도 대남병원에 도착한 오성훈 간호사와 동료 의료진들.

돌발행동에 배설물까지… 병동의 하루

그렇게 시작한 병동 내 업무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단했다. 그가 말한 병동의 하루는 이랬다. 환자의 혈압·체온·맥박·호흡을 체크하는 게 시작이다. 그중 이상 증세를 포착하면 즉시 의사에게 알려 처방을 기다린다. 그다음 환자들에게 필요한 투약 조치를 한다. 밥때가 되면 환자 한 명 한 명의 식사를 챙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컴플레인도 모두 간호사들이 처리한다.

오 간호사는 “환자 연령도 높고 정신질환이 있기 때문에 바지에 대변을 보는 분들이 많았다”며 “하루에도 몇 번씩 배설물들을 치워야 했다. 특히 감염 위험이 있는 것들이라 심리적인 두려움도 매우 컸다”고 털어놨다.

의료진들의 고충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탈출을 감행하는 환자, 주요 검사를 거부하는 환자도 모두 의료진이 상대해야 했다. 병동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 “보호자가 왔으니 날 내보내 달라” “아프고 힘드니까 안 하겠다”는 고함이 울렸다. 오 간호사는 “외부 직원은 병실 내에 들어올 수 없으니 당연히 경호 인력도 없다”며 “환자들의 심정도 이해는 가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환자의 돌발행동은 간호사들이 막았다”고 했다.

“나는 남진보다 나훈아를 더 좋아했어”

환자와 병원을 공포의 대상, 두려움의 공간으로만 생각할 수 없었다. 2~3일이 지나고 적응 단계가 찾아왔다. 누워있는 환자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니 측은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났다고 오 간호사는 말했다.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한 환자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였다.

“젊었을 때는 무슨 일 하셨어요?” “뭘 하실 때 가장 행복하세요?” 질문을 던지자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으로 너무나도 따뜻했다. “벽돌 나르는 일을 했다” “아무개네 농사 일을 좀 거들었다” 평범한 추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환자는 “나는 김소월이나 한용운의 시를 좋아했었다”고, 또 어떤 환자는 “나훈아랑 남진이 라이벌이었는데, 난 나훈아를 더 좋아했다”고 했다. 모두가 행복한 표정이었다.

오성훈 간호사가 청도 대남병원에서 동료 의료진들과 함께 의료 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오 간호사는 “그분들이 다른 병원으로 향하는 날 제게 ‘그때 이야기를 들어줘서 너무 고마웠다. 덕분에 너무 즐거웠다. 꼭 다시 보자’고 하시더라”며 “이때의 기억이 힘든 저를 치유했고 무수한 오해를 풀게 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 저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따뜻한 인사를 남기고 청도 대남병원 확진자들이 타 지역 병원으로 이송되면서 오 간호사의 이곳 근무도 모두 끝났다. 이후 발령 난 경북 안동의료원으로 이동하기 전 남은 건 코로나19 검사였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