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0월 15일 그는 고종 황제의 밀서를 가지고 서울을 출발, 11월 17일 워싱턴에 도착해 미국 정부 요인들과 접촉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정책에 미국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친일화한 미국 정부는 헐버트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1906년 헐버트는 일본의 온갖 박해가 기다리고 있는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워싱턴에서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을사조약으로 외교권마저 박탈된 한국의 자유를 위해 노력했다.
1907년 7월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헐버트는 고종의 밀령을 받아 4월에 출발, 스위스를 거쳐 헤이그에 이르렀다.
그는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각국 대표에게 알리고 한국 대표가 본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러시아 대표이자 회의 의장인 넬리도프에게 호소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고종을 양위시키고 끝내 한일합방을 단행했다.
이제 헐버트는 그토록 정을 쏟던 한국을 위해 더 일하고 싶어도 발붙일 곳이 없게 되자 헤이그에서 바로 미국으로 돌아가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에 정착했다. (집문당 刊 ‘대한제국멸망사’ 역주자 초판 서문 중)
<계속>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