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선언을 주저하던 세계보건기구(WHO)가 11일(현지시간) 결국 팬데믹을 공식 선언했다. 세계의 지도자급 인사들도 앞다퉈 사태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다만 팬데믹 선언이 본 의도대로 코로나19에 대한 국제적 공동 대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여부에는 의문 부호가 붙는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은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최근 2주 사이 중국 외 지역에서 발생한 감염 사례가 13배 증가하고 피해국도 3배 늘었다”며 “앞으로 며칠 혹은 몇주 동안 확진자와 사망자, 피해국 수가 훨씬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강조했다.
WHO가 팬데믹을 선포한 것은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H1N1) 대유행 이후 11년 만이다. 중국과 아시아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던 코로나19가 이제는 유럽과 미주에서도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확산되자 더 이상 팬데믹 선언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미 존스홉킨스 의대 집계에 따르면 12일 오후 3시30분 기준 전세계에서 12만6258명의 확진자와 463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중국에서 첫 감염자가 보고된 지 70여 일 만이다. 피해 국가도 110개국을 훌쩍 넘어섰다.
WHO가 2009년 당시 74개국에서 3만명의 H1N1 확진자가 발생한 시점에 팬데믹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피해가 극심해질 때까지 눈치만 보다 여론에 밀려 뒤늦게 팬데믹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WHO 측이 ‘팬데믹이 공식적으로 진행 중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여론의 압력에 선언한 측면도 있다고 꼬집었다.
팬데믹이 선언된다고 해서 각국에 어떤 의무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각국은 WHO의 팬데믹 선언을 근거로 방역 정책 기조를 바꿀 수 있다. 이미 지구촌 도처에 코로나19가 퍼져있는 팬데믹 단계에선 각국의 우선순위는 국경 봉쇄보다는 사태 완화로 이동하게 된다. 단순히 전염병을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자국 내 전염병이 번지는 것을 실질적으로 차단하는 방식이 권장된다.
거브러여수스 총장은 “우리는 각국에 매일 신속하고 공격적인 대응을 촉구해왔다”며 “각국이 감지, 검사, 진료, 격리, 추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면 소수의 코로나19 사례가 집단으로, 집단이 지역감염으로 악화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세계의 지도자급 인사들도 코로나19에 대해 잇따라 경보음을 울리며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전문가들은 현재 상황이 계속되면 인구의 60~70%가 감염될 것이라고 말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백신도, 치료제도 없다. 무엇보다 관건은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를 늦추는 것”이라며 “우리의 연대와 이성이 시험대에 올려져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전날 “유럽이 코로나19에 대항해 조율된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같은 거대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이 코로나19 국제 공조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관측이 제기된다. NYT는 “세계 지도자들이 이제야 팬데믹의 심각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미국이 과거의 지휘자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않는 국제사회에서 그들의 모습은 합창단이라기보다는 불협화음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료 전문가들의 과학적 조언보다는 여행 금지, 입국 제한 등의 봉쇄 정책에 치우친 모습을 보이며 세계의 다른 지도자들과 협력하는 데 이미 실패했다는 지적이다.
내부적으로는 이민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를 조성하고 국제적으로는 고립주의를 강화해온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가 코로나19 국면을 거치며 강화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전망도 나온다. 외교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세계화와 이민 문제 등에서 대중적 불안감을 조성하며 권력을 획득한 세계 곳곳의 포퓰리스트들이 코로나19를 악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부 세계에서 유입되는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며 코로나19 사태를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