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길 많은 연구자료가 지난해 선보였다. 대표적으로 ‘로버트 가피아스 컬렉션 연구’가 있다. 미국의 저명한 아시아음악학자 가피아스 교수가 1966년 한국을 방문해 기록한 전통음악 관련 자료들로,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등 주요 전통예술의 과거 사진(788점)과 영상(55점), 음향(185점) 자료가 폭넓게 담겨 문화·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 뜻깊은 아카이빙 사업을 주도한 이는 국립국악원의 김희선(51) 국악연구실장. 아이디어 뱅크로 통하는 그는 2016년 9월 국립국악원에 부임해 전통예술의 보존·전승을 위한 다채로운 연구사업을 펼쳤다. 11일 서울 서초구 국악박물관에서 만난 김 실장은 “국립국악원이 공연기관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국악 종가로서 뿌리내리기 위해선 국악 발전을 위한 학술·정책적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며 “지금껏 쌓아온 연구 자료가 향후 국립국악원의 역량의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그가 추진한 사업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특히 전통예술 수집·연구범위를 ‘한민족 예술’로까지 확장해 국악 아카이빙의 의미를 넓혔다. 지난해 말 김경화 전 금강산가극단 지휘자 등 총련계 재일동포 예술가 8명의 구술을 기록한 최초의 작업물 ‘재외동포 원로예술가 구술채록-일본편’이 나왔다. 해외 연구자들이 북한 공연예술을 이해하도록 돕는 첫 영문 개론서 ‘북한의 공연예술’도 선보였다. 지난해 8월 국악박물관이 재개관할 때 음향 전시 콘셉트 도입을 이끈 인물도 김 실장이다.
오는 8월 7일 국악박물관 3층에 개관하는 ‘국악 라키비움(가칭)’은 지난 3년간 펼쳐온 사업의 총아로 볼 수 있다. 김 실장은 “전시 위주 박물관과 자료 수집 중심의 아카이브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으로 결합한 공간”이라며 “영상·음악·글 등 국립국악원이 모아온 40만점에 달하는 국악 자료를 검색하고 감상하는, 일종의 ‘놀이터’ 같은 공간일 것”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국악 버전의 복합문화공간’인 셈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라키비움 한편에 조성될 특수자료실이다. 국립국악원이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모은 북한 희귀 공연예술 자료 1만5000여점이 최초로 일반에 공개된다. 통일부 북한자료센터가 북한의 정치·경제·문화를 아울러 3만여점의 자료를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면 사실상 최대 규모다. 특수자료실에서 선보이는 자료는 악보와 음원, 그림 등을 두루 아우르는데, 북한 음악을 소재로 한 기획 전시와 공연도 열릴 예정이다. 1955년부터 68년도까지 간행된 북한 유일의 음악잡지 ‘조선음악’ 전권을 비롯해 한반도 문화예술의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료들이 다수 포함됐다.
사업에 속도가 붙은 건 2016년부터였다. 통일부 인가를 받아 특수자료실을 만든 김 실장은 연구원과 함께 중국과 일본을 수시로 오가며 자료를 수집했다. 국내 연구진은 물론 북한과 교류가 많았던 중국 조선족과 재일 수집가들도 다수 만났다. 이듬해 한 일본인 수집가로부터 북한 자료 1만여점을 기증받고, 또 구매해 지금의 방대한 아카이빙이 마련됐다. 김 실장은 “모두들 가치가 대단한 자료들로, 한국이 북한을 향한 해외 관심을 리드하는 여건이 문화적으로도 마련된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근·현대 한반도 국악의 모습을 소상히 볼 수 있는 이 자료들이 향후 수십 년간 우리 국악계를 포함해 연극·무용 등 공연예술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실장은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음악인류학을 수학했다. 2018년 한국인 최초 유네스코 산하 국제전통음악학회(ICTM) 동아시아음악연구회장에 선출된 그는 탄탄한 해외 네트워크를 자랑한다. 영국 대영도서관이 소장하던 기사진표리진찬의궤(순조가 할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옷감과 음식을 올린 행사를 기록한 의궤)를 찾아내 영인본으로 출간하고, 201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악기박물관에 국악기를 처음 전시하면서 전통예술의 국제화도 이끌고 있다. 김 실장은 “스페인 전시는 그야말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공연마다 600여명이 자리를 메우고, 워크숍에 인파가 몰리는 걸 보며 한류가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며 “내년부터는 3년간 해외를 돌며 순회 전시를 하려고 준비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부족한 일손과 예산에 늘 녹록지 않다. 단 30명의 연구원이 학술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일일이 들여다본 후, 이를 다시 보강·정리해 책으로 내고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모두 도맡고 있다. 전시장 관리·운영도 담당한다. 국립국악원 부속 건물로 여겨지다 2015년 국립으로 인정받은 국악박물관에는 자료를 모아 놓을 정식 수장고가 없어 수집상의 어려움도 상당하다. 원래 3년에서 1년 연장돼 올해 8월로 임기를 마무리 짓는 김 실장은 아직도 눈에 밟히는 과제들이 많다고 했다.
“국립국악원은 양질의 콘텐츠를 가진 공간이면서, 발전적인 플랫폼이어야 해요. 그러려면 수장고 같은 인프라 구축이 필수적이죠. 그래야 국립국악원과 국악이 해외 학자들은 물론 우리 국민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어요. 국악이 정말 ‘우리 것’이려면 그런 디테일한 ‘감동’이 있어야 하죠.”
강경루 기자 roo@kmib.co.kr